꽃들의향기

명자꽃

샌. 2007. 4. 10. 09:08



10년 전에 살던 곳 화단에 명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명자나무는 유난히도 붉은 꽃송이를 탐스럽게 피웠다. 따스한 봄햇살 아래 온통 붉게 뒤덮인 나무는 마치 훨훨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가까이 접근하기에 두려울 정도로 눈부시게 빛났다.

 

활짝 핀 명자꽃은 화려하게 성장을 한 여인네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꽃 이름이 사람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명자야'라고 가만히 불러오면 왠지 정겨운 어릴 적 동무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색깔이 너무 짙고 화려해서쉬이 다가가기 어렵기도 하다.

 

명자나무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서로 겹칠 정도로 많은 꽃을 매달고 있다. 어떤 때는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명자꽃은 깊은 슬픔과 애조를띄고 있다. 명자꽃 옆에 있으면 괜스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안도현 시인의 '명자꽃'이라는 시가 있어 그런 애절한 마음을 더해준다.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린 까닭이었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藥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 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의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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