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교사도 우울하다

샌. 2007. 3. 22. 09:01

25년 전 내가 첫 발령을 받을 때만 해도 동기 남학생들은 교직을 탐탁해 하지 않아 되도록 다른 데로 진출하려 했다. 그만큼 교직은 보수도 싸고 사회적 지위도 낮은 천직(賤職)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공격 앞에서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위태로워지고 고용불안이 일반화되면서, 교직은 안정적이고 보수도 괜찮은 직업으로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더니 급기야 ‘철밥통’이라는 아주 조소어린 명예(?)까지 얻기에 이르렀다.

예전에 산업분류에 관한 수업을 하면서 교사를 서비스산업 종사자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참 당혹스러운 때가 있었다(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되고 말았지만).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이 그렇듯이,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경제적 시각으로 표현하는 자본주의적 발상의 천박함을 그땐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긴 했었나 보다. 그러더니 이제 아이들 앞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고 ‘철밥통’이라고 하고, 아이들이 제 선생을 고발하는 걸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란다.

물론 교사들이 그 권위를 이용하여 비열하게 아이들을 볼모로 삼아 학부형과 아이들에게 저질러온 비인간적 폭력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사라져야 하겠지만, 그 방식이 기껏 아이들 앞에서 교사를 모멸적으로 짓밟아놓은 길이었다니.... 무엇보다도 그렇게 될 경우 교사가 받는 상처보다 아이들의 영혼이 일그러지며 생기는 상처가 훨씬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일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어리석음과 다를 게 무엇이랴.


그러나 사실 요즘 교사로서 나를 가장 우울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리치의 읽기모임’에서 김종철 선생이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라고 자주 걱정스럽게 얘기하시곤 했는데, 실제로 학교에서 무섭게 변해가는 아이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온 나로서는 그것이 단지 노파심에서 비롯된 걱정이 아님을 안다.

해마다 2월이면 새로 상급학교를 배정받은 신입생들이 등록을 하러 학교에 찾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는 그 아이들은 낯선 곳에 들어온 이답게 수줍고 조심스러운 낯빛을 하고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보고는 했다. 아이고, 이놈들 또 나랑 한참 싸우고 정들 놈들이구만, 이런 생각으로 그 귀여운 모습들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풍경은 접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입학을 앞둔 아이들이 예비소집으로 학교를 구경하는 건 똑같지만, 예비신입생인지 재학생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처음 와보는 학교를 마치 제집 안방인 것처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아무 경계심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고, 학교 후졌다고 흉보기가 예사다. 예전에 그 수줍어하던 얼굴들이 그립지만 이제 아이들의 그런 모습은 적어도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러더니 한 사오년 전부터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치 외계인들 속에 내가 끼어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분명히 같은 한국 사람이고 같은 한국말을 쓰지만 대화가 겉도는 것 같은 느낌, 내 얘기가 저 아이의 가슴에 들어가 앉지 않는다는 느낌, 도대체 정서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 느낌의 원인이 무얼까 하고 혼자 당혹스러워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 아이들 인사를 받다보면 (물론 요새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아이들도 거의 없지만) 간혹 아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을 때에도 왠지 백화점에서 절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네킹처럼 기계적으로 고객을 향해 필요 이상의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백화점 직원들의 인사처럼 알맹이가 없는 공허한 몇 마디 말이 다이다. 자신의 점수를 쥐고 있는 선생에 대한 계산된 예의 차원에서 나온 인사라서 그럴까, 쾌활하게 큰 소리로 인사는 하지만, 녹음된 말을 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다. 간혹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이 묻어나는 인사를 받으면 정말 고맙다. (사실 이게 선생 하는 맛인데, 힘들어도 선생 하는 건 애들 예쁜 맛, 그거 하난데 말이다.)

더욱이 학년이 바뀌고 더 이상 수업에서 만나지 않게 되면 아이들은 요즘 말로 거의 완벽하게 ‘생깐다’(모른 척하고 무시한다)는 것이 여러 교사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아는 아이를 발견하곤 반가움에 내 얼굴 표정이 웃음을 띠려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애들 앞에서 느끼던 그 당혹스러움이란.....

물론 이런 현상이 이 학교의 지역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으나 곧 다른 지역으로도 서서히 퍼져갈 것이 분명해 보이니 걱정이다. 한편으론, 어쩌면 이 아이들이 엄마의 영향을 받아 교사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단지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교사집단’을 향해서 그러는 거라면, 기분은 더럽지만 그래도 안도의 숨을 내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현재의 학교에서는 일단 학생들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수능점수가 잘 나오도록 수업을 해야 하고, 담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시정보의 전달과 자율학습 감독을 확실히 해주는 것이 최고다. 아이들은 교사한테 예전처럼 인간적인 이래, 친밀한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걸 요구한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한테 담임하면서 통제보다는 어느 정도 자율을 주고 개인면담에 더 중점을 두고 아이들을 지도해왔고 여전히 그 소신은 변함이 없다. 지나간 내 고등학교 시절, 아침에 등교하여 엷은 아침햇살이 비쳐드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얘기하던 시간이 나는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도 아침부터 담임이 얼굴 찡그리고 교실 앞에 딱 버티고 앉아 스트레스 주기보다는 어릴 적 나처럼 자유롭게 아침을 시작하게 하고 싶었다. 교장, 교감으로부터 늘 싫은 소리를 들었지만, 사실 별거 아닌 나의 이런 소신은 변함없이 계속 지켜져왔고, 비록 공부 1등반은 아니었으나 아이들과도 서로 불만 없이 잘 지내왔다.

그러나 재작년에 나는 담임을 중도하차하는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아이들 감독에 소홀하다는 교장과 학부모들의 비난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일부이기는 해도 아이들마저 아침시간의 느긋한 자유를 맛보게 해주려는 나의 방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효과적인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충격이었다.

담임 사직 인사를 몇마디 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안심했다.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구나. 슬픔이란 걸 못 느낄 것 같은 애들이었는데, 그래도 예전처럼 이런 일로 울음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게 그나마 고맙고 위안을 주었다.

물론 담임을 그만둔 실제의 가장 큰 이유는 건강상 담임 일을 계속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었지만, 아이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충격은 이제 더 이상 나 같은 교육철학 가지고는 아이들 맡는 게 곤란해지게 되었다는 우울한 깨달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침이면 잠이 부족해 충혈된 눈으로 등교하는 애들이 너무 안쓰러워, 학원과 독서실을 강요하며 잠도 못 자게 매섭게 몰아대는 엄마가 밉지 않냐고 농담처럼 물어보면, 아이들은 무슨 말씀이냐며 펄쩍 뛴다. 그런 엄마가 너무 고맙다는 것이다. 오히려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통제해주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정서이다. 방학에도 학원에 붙잡혀있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천만의 말씀! 요즘 아이들한텐 “학원 안 보낸다”고 하는 것이 꽤 효과적인 협박이 될 정도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아이들이 불행한 것은 맞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이 그렇게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이 아이들도 스스로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니, 억압을 억압이라고 느낄 수조차 없는 아이들의 정서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에 내가 맡았던 지리과 교생은 지금 아이들의 10년 선배여서 더욱더 아이들과의 대화를 기대하며 그들과 가까워지려 애썼는데 기대대로 되지 않아 당혹스러워했다. 예전 같으면 학교 안에서 ‘교생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 아이들은 교생한테조차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 많아졌다는 걸 느꼈다는 고백도 나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자신의 고교시절에는 부모와 진로문제로 마찰을 빚어 갈등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는데 지금 아이들에겐 그런 고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부모가 지목하는 길, 현실지향적인 출세 성공의 길로 아주 순순히 따라간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그 험난한 입시지옥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춘기란 어린아이 시기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실존적 고민에 들어가게 되고 이상을 더욱 추구하는 시기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현실감각은 부족해서 냉정한 현실적 기준을 가진 기성세대와 충돌하는 게 한 인간의 성장에서 필요불가결한 과정 아닌가. 그러나 그런 사춘기의 ‘반항’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이제 사라져버리고 있다. 지금 아이들에겐 인생의 고민 같은 건 할 시간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안 된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소비’를 통한 자기과시가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지는 게 필수적이다. 그러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원하는 부모의 요구에 아이들이 ‘반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이나 되는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마마보이’, ‘마마걸’로 자라 학교에서도 교사가 옆에서 지켜봐야만 안심하는 무능력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출세에 눈이 어두워 진짜 행복이 뭔지 생각도 못하고 남들한테 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 엄마들까지는 그 욕심으로 보아 이해될 수도 있다. 그저 자식들이 남보다 많이 가지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단순한 욕심일 것이고, 그런 욕심이야 어느 시대 부모들이나 갖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얘기가 큰 과장이 아닌 현실에서 절박함을 느낀 부모세대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악다구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볶아대는 건 그래도 조금은 납득이 된다.

하지만, 어른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거기에 대해 절망하고 반항하고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거창한 이상을 품고, 나아가 자신이 몸담은 사회와 이 사회의 역사를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기성세대의 이기적이고 현실 타협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정직하게 괴로워하며 그에 대한 고민으로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탈출구를 찾아헤매는 것이 젊은이들의 진정한 초상이라고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일에 남이 끼어드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더구나 몸은 어른이고 사회적으로는 아이 취급을 당하는 현대사회의 청소년기에서야 간섭받기 싫어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부모의 간섭이 싫어져야 하는 게 정상적인 과정 아닌가. 그러나 한창 꿈을 갖고 자유를 열망할 나이에, 부모의 현실적인 감각을 재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부모와 아무런 갈등도 없이 현실적인 목표에 얄미우리만치 자신을 적응시키는 이 아이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이 진짜 무서운 일 아닐까.


오랫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늘 수수께끼같이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이 죽은 교육을 왜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교과서와 밀폐된 교실과 교사의 주입식 수업에 의한 완벽히 죽은 교육을 아무 흥미도 갖고 있지 않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죽어라고 집어넣으려 애쓰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누군들 이게 말도 안 되는 죽은 교육이란 걸 느끼지 못하겠는가. 사회 전체적인 구조변화를 통해 얼마든지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을 시킬 수 있을 텐데도, 왜 이렇게 아까운 예산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시스템 속에서 죽은 교육을 날마다 하고 있지만 나라 전체가 바보짓을 열심히 하고 있다니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 아닌가.

그러나 이젠 그게 사실은 ‘계산된’ 바보짓임을 알겠다. 이 사회의 지배계층들에겐 지금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바로 이 ‘죽은 교육’이었던 것이다. 사고가 자유로워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볼 줄 알며, 자신보다 공동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고, 자신의 이익추구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소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인간형이 사회에 많이 배출된다면 현재의 이 체제는 영락없이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지배적 통념에 저항하며 참교육을 내세우는 전교조를 기득권세력들이 “현재 우리사회의 5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적당히 멍청한, 생각 없는 좀비형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완전히 죽어있으면 일을 부려먹을 수 없고, 완전히 깨어있으면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들을 눈뜨고 볼 수 없으니, 그것들에 대항하여 들고일어날 게 뻔한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인간형, 즉 적당히 일은 시킬 수 있을 만큼 기능을 갖춘, 그러나 사회의식이나 타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각 같은 건 갖추지 않은 그런 인간을 충실히 키워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제도교육인 것이다.

요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소비를 통한 자신의 과시를 제일의 과제로 삼는 인간형이 만들어져 기업의 요구를 충실히 채워주고 있는 지경이다. 이렇게 아주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잘 수행해온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왜들 이럴까 하면서 혼자 끙끙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뿐이다. 이 사회는 내 걱정과는 달리 ‘원래의 의도대로’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던 거다.

그나마 그동안은 제도교육이 아무리 인간을 완벽하게 개조하려 애써도 그 작동방식이 그런 대로 느슨했고 그동안의 사회가 지녀왔던 문화의 힘이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 그 벽을 허물고 제도교육이 의도하지 않은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사회운동세력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공격 앞에서 지나간 시대의 모든 문화전통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예전처럼 감옥에 가두고 협박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살할 수 없었지만, 물질의 풍요 앞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품성들은 그만 맥을 못추고 허물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의 실제 생활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사람들 만나는 것, 일하는 것 모두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정치와 뗄 수 없는 게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 삶인데, 갈수록 진지한 정치적 관심은 외면당하고 탈정치화되는 세상에서는 소비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로봇 같은 인간형이 생산될 수밖에 없다.

소비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정신을 잠들게 하는 데에 이보다 더 특효약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 속에 파묻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생활로 사진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남들과의 권력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영혼이 빈 아이들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으니, 이런 사회를 원하는 쪽에서는 춤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 같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교육제도를 통해 아이들을 사회문제에 눈 돌리지 않고 잘 순응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한창 인생의 방향을 모색할 나이에 입시와 취업으로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제도적 공교육이 결국은 지배층의 이익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라면 이제 진정한 교육은 공교육에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내겐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막강한 공교육체계, 기업의 힘을 뒤에 숨기고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는 대중매체들, 이기주의에 빠진 학부모들의 파워, 이런 것들로 끊임없이 포화를 맞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른 길을 보여준단 말인가. 다만 그동안은 이러한 틀, 즉 교육부, 교과서, 학교단위의 교장의 지시, 그리고 학부모들의 성화 속에서도 아직 기존 체제의 세례를 확실히 받지 않은 아이들이 나의 편이 되어주었기에 그런 대로 교사 개인의 목소리가 아이들에게 지배적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전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군이었던 아이들마저도 이제는 기존 체제의 입장을 제 것으로 하고 오히려 더욱 무서워진 소비문화의 첨병으로 자라고 있다. 게다가 냉혹한 이기주의의 화신으로 변하여 교사에게 ‘입시 서비스’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교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만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는 단지 자본주의의 맹아시기에 필연적으로 벌어진 사회경제적 현상이라고 배웠던 영국에서의 인클로저 운동 당시, 사람들이 이 공유지에 울타리치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은 물론 그동안 누구나 자유롭게 공동으로 사용해온 공유지를 빼앗김으로써 생계가 갑자기 불안해진다는 생존문제에서 나온 절규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겐 사람이 발 딛고 서 있고 그곳에서 나는 작물로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이 토지가 한 개인의 소유로 되어 배타적으로 그 한 사람의 이익추구에만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에게도 땅을 팔라는 백인들의 말이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듯이, 어쩌면 이제 새로운 인간형이 바야흐로 탄생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같은 ‘구시대의 인간’들은 그들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고, 그들 또한 우리의 당혹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변화가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어 과연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종잡을 수 없지만, 어쩌면 인류역사는 이미 한 곳으로 방향을 틀고 나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안타까운 시대에 학교현장에 서서 달라지고 있는 아이들을 한해 한해 지켜보며 그들의 무서운 변화를 이 사회의 누구보다도 앞서 느낄 수밖에 없는 나 같은 교사에겐 요즘 우울한 때가 자주 찾아온다.

지난해 어느 땐가 교실에서 이런 아이들로 인해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바깥의 나무라도 좀 보기 위해 창가 쪽으로 다가가니, 창틀엔 아이들이 뱉어놓은 가래침이 질펀하게 고여 있었다.

그날 나는 정말 우울증에 걸리는 줄 알았다.


- '녹색평론'에 실린 유영미 님의 글을옮겨 적다. 나에게도 절절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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