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공개 강의를 했습니다. 그 강의 주제가 '희망의 언어 -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습니다. 직접 가 보지는 못했고 저는 인터넷으로 중계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석과불식은 주역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주역 64 괘 중제일 절망적인 괘가 박괘(剝卦)인데 그 박괘를 설명하는 말이 석과불식인가 봅니다. 해석하면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 또는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라는 뜻이랍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이 박괘에 비유될 정도로 어려운 것으로 선생님은 보는 듯 합니다.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세계화의 물결,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재편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버리면 안되는데, 그 상징적인 구절이 바로 석과불식입니다.
그 희망은 바로 씨앗에서 시작됩니다. 씨앗은 바로 사람이라고 선생님은 설명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가는 과정은 우선 엽락(葉落)에서 시작되어야 한답니다. 엽락이란 말 그대로 잎사귀는 떨구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게 감싸고 있는 잎사귀를 떨구고 나무의 진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의 비인간적 구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잎을 떨구기 위해서는 겨울이 와야 합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들지만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한 고민의 계절입니다. 이런 정신적 단련이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두 번 째 단계는 분본(糞本)이라고 합니다. 뿌리에 거름을 한다는 뜻입니다. 잎이 떨어지면 자연적으로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세 번 째가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씨입니다. 이 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숲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작은 나무, 큰 나무, 튼튼한 나무, 약한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숲이 되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런 인간적인 세상에서는 못난 것이 흠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잎을 걷어내고 구조를 직시하고 다시 가장 중요한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숲이 되는 방법, 사람이한 나무를넘어 숲의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숲의 사람이 되는 것은 머리에서 가슴의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from Head to Heart' - 이것이야 말로 가장멀면서 가치있는여행입니다. 결국 한 인간의 완성에의 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세상의 변화를 너무 조급히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생각만큼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군요.당장의 열매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좋은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고, 그리고 그 노력하는 과정이 아름답고 인간적이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좋은 세상은 이미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선생님의 마지막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20 년의 감옥 생활을 겪고도 저렇게 여유있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마음의 품이 너무나 넓어 보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본인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인내하며 지냈을까요. 모든 담론이나 사상이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우선 저 자신이 숲 속의 한 바른 나무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