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앉아서 유목하기

샌. 2006. 4. 28. 13:44

‘유목(遊牧)’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목초를 따라 소, 양, 말 등의 가축을 몰고 다니며 하는 목축이라 나와 있고, ‘유목민(遊牧民)’이란 유목을 하면서 이동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머물지 않으면서 항상 새로운 삶의 조건을 찾아 움직이기 때문에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착민과 대비됩니다.


요즈음 유목(nomad)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나온 어떤 책 표지에는 ‘우리는 유목하는 행복 게릴라 부부’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는데, 유목이라는 말이 무척 낭만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정착민과 유목민의 구분이 뚜렷했으나 정착민에 의해 현대문명이 건설된 후 유목민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습니다. 실제 사막이나 고산지대 등에 남아있는 유목민의 숫자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 유목이라는 개념이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왜 지금에 와서 다시 유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지,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노마드’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어서 그런지, 인터넷으로 전 세계 어디나 연결되고 지식의 교류가 가능해 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튼 유목의 기본 속성은 이동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표어도 그렇지만, 앞으로 도래할 세계화라고 부르는 시대를 주도할 이데올로기로 많은 사람들이 유목주의를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목이 쉼 없는 이동, 끊임없는 도전과 경쟁, 지치지 않는 적극성 등으로 나타난다면 안 그래도 어두운 인류의 미래는 더욱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자크 아탈리라는 철학자는 앞으로의 사회를 살아갈 인간을 ‘하이퍼 노마드’, ‘정착민’, ‘인프라 노마드’,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하이퍼 노마드란 지식과 기술, 자본으로 무장하고 자유롭게 전 세계를 이동하면서 여행하고 교역하며 사상을 교류하는 부유한 지배 계층을 말하고, 인프라 노마드는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을 의미하며, 정착민은 자기가 나고 자란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로 주류 계층인 하이퍼 노마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힘없고 나약해서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목적 관점에서 미래 사회를 예견하고, 미래 사회 역시 더 계층화된 구조로 될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유목적 능력이 또 다른 자본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지 모릅니다. 여기서도 적응과 소외된 인간 사이에 지배, 복종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런 면에서 유목은 다른 자본주의적 요소들처럼 파괴적이고 절망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유목이라는 말 속에는 긍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변화, 자유, 이동, 개인 또는 소집단, 새로움, 안주에 대한 거부, 창조 등이 유목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에 유목적 특성이 강조될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반체제의 저항적인 경향도 그 속에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목의 가장 큰 정신적 특징은 기존의 체제를 답습하지 않고 늘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목적 능력이란 자신만의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살면서 어떤 대상이나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목한다’는 의미는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든 사상이든 하나의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목민이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뜻을 가진 유목적인 삶이라면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서의, 삶의 철학으로서의 유목적인 정신의 가치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정착 문화가 남긴 탐욕의 역사에서 떠나야 할 논리를 유목적인 가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앞에 나왔던 한 젊은 부부의 ‘유목하는 행복’이라는 말이 가지는 참 의미일 것입니다.

침략과 정복이 아닌, 쫓기고 쫓아가는 이동이 아닌, 진정한 정신의 자유로서의 유목,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앉아서 유목하기’란 말이 그래서 더욱 고맙게 들리고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표가 될만한 명제라고 생각됩니다. 정착과 유목이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조화롭게 어우러져 지금과는 다른 새 세계를 만들 수 있기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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