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절두산 성지

샌. 2005. 9. 4. 14:57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드리다.


이곳은 예전에 양화나루였던 곳으로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조 이후에는 송파나루, 한강나루와 함께 서울의 삼대 나루로 상업적 기능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절두산은 양화나루 옆에 솟아있는 높이 약 20m 되는 암벽이다. 원이름은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모양 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었는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140년 전에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형을 당해서 그 이름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는 비극의 현장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나루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렵혀진 한강물은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천주교 무리들이 외세를 불러들이려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병인박해(丙寅迫害)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프랑스 함대가 들어온 이곳으로 정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했는데 죽음을 당한 이가 수천 명에서 많게는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목이 잘리고, 또 산채로 밧줄에 묶인 채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고 한다.


이곳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며 옛일을 되새겨보면 마음이 무척 착잡해진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겨야 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자체가 그 시초부터 이런 피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순교를 당한 사람의 억울한 피눈물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박해자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악역을 맡아야만 했을까? 무심한 한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없이 흘러가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노라면 인간과 인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지금 그 자리에는 성당과 박물관으로 된 큰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파트와 일반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서쪽 방향으로는 양화대교가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밑으로 굽어보는 비극의 절벽에는 옆으로 나있는 고가도로 위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만이 변한 세상을 일깨워주려는 듯 울려오고 있다.

 



 

9월은 가톨릭에서 순교자 성월로 기리는 달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이 박해시대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물질만능의 극을 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 옛 순교성인들 거룩한 신앙을 과연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숱한 유혹들은 순교의 현대적 의미를 일깨우는 칼날과 같다. 오늘날 순교는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자 그같은 칼날에 과감히 맞서 싸우는 것이다. 참된 신앙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국 매일매일이 박해시대요, 신앙의 시험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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