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할아버지,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요

샌. 2003. 12. 15. 16:21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이다.
분명히 내 육체도 연속적으로 늙어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평상시에는 잘 의식하지 못한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대로 마음이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월의 흐름을 알아채게 된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감지하고 불현듯 놀란다.

어떤 때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내 나이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주름진 얼굴에서, 또는 훌쩍 큰 조카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에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느낀다.
또 아내의 돋보기 쓴 모습이나 하나 둘씩 늘어나는 흰 머리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마음까지 아리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럴 때는 무척 어색하다. 내 나이가 얼만데, 도대체 외모가 어떻게 보이길래 이 지경까지 갔는지 쓴 웃음만 나온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몰래 살펴본다. 아무리 그래도 자리를 양보받을 정도까지는 되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는 자리를 양보해 줘도 별로 고맙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날도 있었다.

가끔씩 들리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꽤 취한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늘 다니는 길이라 무의식적으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소변기가 보이지 않았다.
희한하다. 별 일도 다 있구나. 이쪽 저쪽 아무리 찾아보아도 헛일이었다. 되돌아 나올 줄은 모르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한 여자 분이 불쑥 들어오더니 놀라서 멈칫했다. 아뿔싸, 내가 잘못 들어왔구나.
그런데 바로 들려오는 말, "할아버지,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
여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온 창피함보다도 할아버지라는 호칭에 술이 확 깼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외에는 다른 대꾸도 못하고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거울을 보니 거기에는 삶에 찌들은 초라한 사내가 있었다.
흰 머리칼로 어느덧 반백이 되었으니 할아버지로 본들 누구를 탓하랴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얼굴은 아직 동안(童顔)인데.....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로 보다니,
그 여자 눈이 삐었지 삐었어.....`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일-밥 혜성  (2) 2004.01.08
[펌] 신문 칼럼  (1) 2004.01.03
오래된 미래  (0) 2003.12.11
한가한 오후  (0) 2003.12.05
침묵의 달  (2) 2003.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