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신문 칼럼

샌. 2004. 1. 3. 10:22

한겨레신문 신년호에 실린 칼럼 두 편을 옮깁니다.


경제종교 /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오늘 아침 신문을 들추다가 열두 살 어린 아이가 천만 원을 모았다는 책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고 가슴이 덜컥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어른들의 광포한 돈 놀음이 아이들의 영혼까지 갉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도대체 아이가 천만원씩이나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단돈 만원에도 신의를 밥 먹듯 저버리는 세상 인심을 모르고 이런 일을 기획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아주 어릴 때부터 돈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지. 아직 읽어보지도 않고 책에 대해 긴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충격적인 광고카피만으로도 지금 이 세대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일찍이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의 통치 아래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신 앞에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권력자들은 바로 그 점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종교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권력행사가 신으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권력자는 만인 위에 우뚝 서게 되었고, 야심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의 후광을 입기 위해 정치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신에 의한 통치를 인간에 의한 통치로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경제’다. 아무도 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는 신이고 뭐고 없었다.
경제는 신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뿌리를 박고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신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름하여 ‘물신(物神)’이다.

그렇다. 우리는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의식적이건 무의적이건 물신을 추구하며 산다.
오늘은 어떤 신제품이 나왔는지, 어디 목좋은 땅이 나온 건 없는지, 요즘 잘 나가는 주식은 무엇인지 남에게 뒤질세라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 한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더 근사한 집, 더 편리한 기구를 사기 위해 죽어라 돈을 번다.
바야흐로 경제가 알파요 오메가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어릴 때부터 경제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광고가 버젓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교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건 왜일까?
물론 물신에 의해 위축된 영혼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확실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물신과 신이 함께 번성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금의 종교가 물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물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와 사찰이 날로 거대화, 상업화, 권력화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종교는 경제에게 말한다. “너는 뛰어봐야 벼룩이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너는 죽어라고 일하여 번 것을 내 제단에 갖다 바쳐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네가 진정 돈과 마음의 평안 둘 다를 얻고자 한다면 나를 믿고 의지할지니.”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교는 좀 더 세련된 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경제는 종교가 되어버렸고 종교는 여전히 고고한 척하지만 경제에 빌붙어 자신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경제활동에서 탈락한 사람은 어디에서고 구원의 손을 내밀 곳이 없는 것이다. 그 옛날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정치인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나 기업인의 상납, 서민들의 카드빚, 과도한 교육열 등 신문지상에 실리는 기사의 거의 모두가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락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이다.
더 이상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새해 첫날이다.
사람들은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오늘만큼은 비장한 각오로 새로운 결심을 하곤 한다.
조금 두렵고 버거운 주문일지 모르겠으나 새해엔 `경제종교`에 대하여 스스로 이단자임을 선포하고 그 행동강령을 만들어 쉬운 것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결심을 해보면 어떨까?


우리의 ‘오래된 미래’는 어디에? / 박혜영(영남대 영문과 교수)

최근에 <오래된 미래>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녹색평론이 주관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연사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헬레나는 히말라야의 작은 티베트로 알려진 라다크에서 16년 이상 머물면서 그 토착문화의 아름다움과 삶의 방식을 세계에 소개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래된 미래>는 단순한 오지 기행문이 아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인도나 히말라야 명상 기행문들처럼 번잡한 도시와 기술문명을 잠시 등진 채 원시의 소박함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고통을 위로 받으려는 그런 지적 소비주의에 편승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척박한 자연과 공존하는 라다크의 검소한 생활방식에서, 이웃들과 이루는 조화로운 삶의 지혜에서, 그리고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는 작은 오래된 경제에서 우리가 근대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소중한 가치를 놓치며 사는지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나가 일주일 간의 서울 방문 끝에 놀란 표정으로 내게 한국의 수천년 역사는 다 어디에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산업화가 시작된 지 불과 40년 정도라면, 그 전까지 사람들이 살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어째서 서울 어디를 가도 모두 시멘트 건물에 아파트 일색이고 거리에는 자동차에 상업 전광판 밖에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았을까?
한국전쟁과 새마을운동을 들먹이면서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지만 나 역시 정말 궁금해졌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우리는 새마을운동으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했다고, 그래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이제 새 나라를 건설했다고 해야 옳았을까?
우리는 비상하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해 오직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그래서 반도체와 자동차 같은 수출산업에 주력하느라고 돈이 안되는 오래된 것은 다 쓸어버렸다고 말해야 옳았을까?
아니면 가난에서 벗어나 우리보다 늘 50년이나 앞서가는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국민소득 2만달러가 될 때까지 파이를 키우자고, 그러니까 분배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맹목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았을까?

겨우 오래된 곳을 찾아 보여준 것이 스타벅스가 그 초입부터 외국인을 반기는 인사동 골목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덕수궁도, 창덕궁도 있고, 아름다운 비원도 문화재로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생존의 자연적 한계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이웃들과 공생하기 위해 불편한 생활조건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가난을 돌봐주고 배려해주던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새겨져있는 그런 오래된 유산은 남아있지 않다.
근대화, 산업화가 처음 시작된 영국의 런던에도 남아있고, 유럽 최강의 기술강국 독일의 베를린에도 남아있고, 거듭된 세계대전의 전쟁터였던 체코의 프라하에도 남아있는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는 사라지고 없다.
결국 우리는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심지어 미국보다도 더 근대화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거대한 산업성장과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너무 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잃어가고 있다.
며칠 전에도 카드 빚에 쪼들린 아버지가 자신의 두 아이들을 마치 인형 던지듯이 한강에 집어던진 일이 발생했다. 11월에는 아버지가 두 자녀를 공기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고, 그보다 더 전에는 한 주부가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두 아이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던져버리고, 자기도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지금이 아우슈비츠의 시대인가?
헬레나는 오래된 것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지혜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큰 것,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 작고 연약한 것들을 물에 던지고, 내동댕이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오래된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아야 할 것인가?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를 돌봐주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모두 가파른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밀쳐내고 있다. 그 꼭대기엔 결국 소수밖에 설 수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머지를 모두 던져야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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