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샌. 2011. 8. 10. 09:25

1976년에 처음 나온 잡지 <뿌리깊은나무> 창간호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표지에는 쌀을 쥐고 있는 투박한 농부의 손 사진이 실려 있었다. <뿌리깊은나무>는 당시의 교양 월간지 관행으로 보면 파격적인 형식을 취했다. 아름다운 사진이 많았고 잡지 디자인도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시사 문제보다는 한국의 전통 문화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고 비판도 받았다.

<뿌리깊은나무>를 발행한 분이 당시 브리태니커 회사 대표였던 한창기 선생이다. 편집장은 윤구병 선생이 맡았는데 윤 선생 말에 의하면 이런 잡지를 출판하면 몇 달 못 가 망한다고 모두가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선생의 고집이 미국 본사를 설득해 결국 품격 높은 잡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뿌리깊은나무>는 잡지라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만으로도 기억될 만하다. 나도 당시에 이 잡지를 보면서 무척 낯설어했다.

윤 선생이 전하는 <뿌리깊은나무>의 금기 깨기는 다음과 같았다.

1. 잡지 제목이, 더구나 월간 교양지 제목이 네 글자를 넘으면 망한다.

- 그때 가장 이름이 긴 월간지가 여성지 빼고는 <문학사상>이었다.

2. 제목을 한글로 달면 망한다.

- 지성인은 한자와 한문을 선호한다. 오죽하면 <창작과 비평> 같은 진보적인 계간지조차 제목을 한자로 썼을까.

3. 가로쓰기를 고집하면 망한다.

- 그때 <창작과 비평>만 가로쓰기를 고집했을 뿐, 심지어 여성지들까지 모두 세로쓰기를 했다.

4. 교양지가 국판 크기보다 더 크면 망한다.

- 왜냐하면 한국에서 본뜬 월간 교양지인 <분게이슌주(文藝春秋)> 같은 일본잡지들이 거의 한결같이 국판 크기였기 때문에.

5. 두툼하지 않으면 망한다.

- 그때 신문사를 끼고 나오던 월간 잡지들인 <신동아>나 <월간중앙>, <월간조선>들의 두께가 500면 정도였는데, <뿌리 깊은 나무>는 180면에 지나지 않았다.

6. 부록을 곁들이지 않으면 망한다.

- 월간지들이 너도나도 단행본 형태의 부록을 끼워주어 독자들을 현혹하던 시절이었다.

7. 한글 전용하면 망한다.

- 한자와 영어를 섞어 써야 교양인이 교양 있는 잡지로 여긴다고 해서 거의 모든 교양지가 한자와 외국어 낱말로 도배하다시피 하던 판이었다.

8. 필자 글에 교정 이상의 손을 대면 망한다.

- 교과서 글이 잘못 되었다고 뜯어고치는 사람 보았느냐, 그런데 교양지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 또는 앞으로 모두 교과서에 글이 실리거나 그럴 공산이 큰 사람들이다. 필자들이 잘못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천인공노할 짓이다, 라는 신화가 지배하던 분위기였다.

9. 교양지에 광고가 많이 실리면 망한다.

- 교양인을 광고를 싫어한다. 교양지는 상품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질서를 드러내놓고 인정하면 그 잡지는 교양인인 독자들에게 외면당한다.

10. 편집자들이 필자의 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 망한다.

- 필자는 왕이다. 필자의 글에 칼질을 하는 순간에 필자들은 그 잡지에 등을 돌린다.

11. 필자의 글이든 편집진에서 쓴 글이든 제목을 쉽게 쓴다고 길게 늘이면 망한다.

- 이를테면 ‘유행의 시대적 고찰’이라고 해야지, ‘유행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바뀌나?’ 같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12. 연재물이 하나도 없으면 망한다.

- 신문 소설처럼 다음 호를 기다리게 하는 미끼가 없으면 잡지를 계속해서 사볼 동기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13. 표지에 사진, 그것도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의미 있는 사진을 쓰면 망한다.

- 그런데 <뿌리 깊은 나무>가 창간호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톱이 몽그라지고 쪼글쪼글한 노인의 두 손이 쌀을 한 움큼 쥔 사진을 표지고 내놓다니, 앞날이 훤히 내다보인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14. 차례에 각별히 신경 써서 길고 다양하게 기삿거리들을 펼쳐 보이지 않으면 망한다.

- 그래서 당시에 교양 월간지는 여러 면으로 펼쳐지는 목차를 크기가 다른 활자로 울긋불긋하게 꾸몄다. 그런데 <뿌리 깊은 나무>는 한쪽에 똑같은 글자로 차례를 다 때려 박았다.

15. 널찍한 여성지 크기면 망한다.

- 여성과 교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마초적 여성관이 은연중에 교양지를 보는 남자들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시절이었다. 여성지를 연상시키는 것만으로도 교양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16. 다달이 특집이 실리지 않으면 망한다.

- 모든 월간지가 특집 하나만으로 모자라서 제2, 제3의 특집을 마련하여 독자의 눈길을 끌던 때였다.

한창기 선생의 글 모음집인 <뿌리깊은나무의 생각>을 읽었다. 국어와 우리 문화에 대한 선생의 뜨거운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문화계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전통문화 보전이라는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한 개인이 감당한 셈이다. 우리 것을 사랑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책머리에는 한창기라는 사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창기라는 사람,

울며 떼쓰기를 잘 해서 별명이 앵보였던 아이,

논두렁 위에서도 학교에서 배운 좌측통행을 고집하던 아이,

청소년기의 그이는 라디오의 단파 방송을 들으며 혼자 영어를 터득했다.

대학에서 법대를 다녔지만 고시 공부 같은 데엔 관심이 없었다.

젊은 시절의 그이는 미군을 상대로 영어 성경책을 팔고 비행기 표를 팔다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파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윽고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판소리와 민화와 한국 민속에 깊이 빠져서

판소리 전집도 만들고 민요 음반도 만들고

찻그릇도 만들고 차도 만들고 반상기도 만들고 옹기도 만들었다.

군사 정부의 손에서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뒤로 한국의 발견을 만들었고

뒤이어 샘이깊은물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이를 멋쟁이로 기억하고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천구백삼십육년에 태어난 그이는 천구백구십칠년에 예순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좀 일찍 떠났다.’

그분의 삶 자체가 상당히 엉뚱한 데가 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는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외국 책 파는 회사를 찾아간 것부터 그렇다. 법 공부를 하면서 적성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왜 이런 회사에 들어오려 하느냐는 면접관 질문에 ‘먹고살기 위해서’ 라고 간단히 답했다고 한다. 책에는 1983년에 쓴 ‘그 사람들의 한평생’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본인이 보성 벌교 출신인데 전라남도 사람들의 한살이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글에 나오는 전라도 토박이 사투리가 정겹다. 내용 중에서 전라도 아이들의 놀이와 먹을거리에 대한 설명을 옮긴다.

그가 머시메였다면,

아이들과 만났다 하면 숨긴 것 찾아내는 놀이인 고두밥 먹기, 눈 가려진 사람이 던지는 신짝을 받는 신짝 뗑기기(던지기), 손 짚고 게걸음 뛰기, 상대편에게 깍지 낀 손을 내밀어 한 손으로 당겨 채게 하는 씹 주기, 멀리 싸는 놈이 이기도록 되어 있는 오줌 누기, 씨름, 한 발 들고 한 발로 걷는 깨금 쫓기, 땅속에 묻은 고리를 막대기 꽃아 찾아내는 고리 묻기, 땅 뺏기, 낫 꽂기, 소나무 옹이로 만든 공을 공매라는 막대기로 치는 조선식 하키인 공 치기, 엽전으로 돌을 쳐 넘기는 비석 치기, 넓이뛰기인 푸럼뛰기, 기마전인 와가리 싸움, 꼰뒤기(고누두기), 장기 두기, 돈치기, 엿치기, 팽이치기, 연 띄우기, 대로 엮은 통태나 장군테를 굴리는 도롱태 굴리기, 짚을 처녀의 댕기 머리같이 땋아서 끝에 삼으로 꼬리를 달고 침 발라 휘두르다가 꺾어 채 ‘땅’ 소리 내는 뙈기 치기, 빽총 쏘기, 새총 놓기, 제기 차기 같은 것을 했을 것이다.

그가 가시내였다면,

이른 봄에 논두렁, 밭두렁에 나는 깐치발(까치무릇)이나 물긋닢(무릇잎)을 뜯어다가 풀각시를 만들며 놀았을 터이고, 땅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금파리와 꼬막 껍질 같은 것을 주워 모아 정제(부엌)와 장고방(장독대)의 그릇들로 삼고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장작벼늘(장작더미)을 만들어 사금파리 솥에 흙을 넣어 밥 짓는 시늉을 하면서 좀 더 나이 든 가시내들에게 배운 대로 그것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솔 때, 불 때, 정제 나무 푸그렁” 하고 노래하는 빠깜살이(소꿉놀이)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키가 커지면서 손바닥의 엽전을 손등에 올렸다가 다시 손바닥에 받는 조세 받기, 숨바꼭질, 독뱉기(공기 받기), 널뛰기, 머리가 치렁치렁한 처자(처녀)가 되어 가면서 차례로 등을 밟고 노는 놀이인 지와 볿기(기와 밟기), 여럿이 앞사람의 허리를 안고선 줄의 꽁무니에 있는 사람을 ‘따는’ 외따기, 그네뛰기, ‘하늘에는 별도 총총’ 하고 노래하며 강강술래를 하였을 것이다.

먹을거리로는,

봄에 땅이 녹자마자 물이 오르기 시작한 띠 뿌리, 잔디 뿌리를 캐서 흙도 채 털기 전에 잘근잘근 씹어 먹었을지도 모르고 산에 가서 물오른 생솔가지를 꺾거나 솔 줄기를 깎아 달착지근한 ‘송쿠(송기. 물오른 소나무 속껍질)’를 해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들에 가서 삐비(삘기)를 뽑아 먹었을 터이고, 뽕밭에 가서 오들개(오디)를, 산에 가서 산딸기‘포리똥(보리수나무 열매)’을 따 먹었을 터이며, 늦여름이면 명밭(목화밭)에 가서 주인 몰래 목화 다래를 따 먹었을 터이고, 가을이면 팽나무 타고 올라 을, 뒷산에 가서 깨금(개암)을 따 먹었을 터이고, 깊은 산중에 살았으면 으름, 멀구(머루), 다래를 따 먹었을 터이다.

보릿고개를 맞은 동네에서 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들은 가시내와 젊은 아낙들이었다. 그들은 ‘너물 바구리(나물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논두렁으로, 밭두렁으로, 산으로 가서 ‘너물 칼’로 나물을 캤다. 음력 정원 보름이 지나면, 보리밭 고랑에 나는 ‘구실뱅이’ ‘가상커리’와 논두렁, 밭두렁에 나는 쑥과 ‘나생이(냉이)’를 캐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 음력 이월 초순에는 보리밭에 나는 ‘깨조백이’, 밭두렁에 나는 ‘지청구’도 캐다가 국 끓여 먹었고, 그 중순부터 나기 시작하는 ‘숙지’‘바깔’은 데쳐서 된장에 무쳐 먹었다. 음력 이삼월에는 거름하려고 지난가을에 논에 씨 뿌려 심은 ‘지우녕(자운영)’을, 쇠어 꽃 피기 전에 베어다가 데쳐서 울궈(우려) 된장에 무쳐 먹었으며, 개천에서 못생긴 불미나리를 뜯어다가 데쳐서 초에 주물러 먹었다. 또 그 즈음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끈끈한 뜬물(뜨물)이 나는 ‘싸랑구리’를 캐다가 데쳐서 무쳐 먹었으며, 혹시라도 쉬면 다시 물에 울궈 무쳐 먹었고, ‘항기꾸(엉겅퀴)’, ‘뚜깔’, ‘지보’와 취같이 생겼지만 잎을 뒤집어 보면 빛깔이 하얀 ‘본취’를 캐다가 삶아 국 끓여 먹었다. 그 즈음은 또 도라지와 더덕을 캐다가 생으로나 데쳐서 먹고, 보리갈이 안 한 논이나 밭에서 ‘독새’를 베어다가 썰어서 씻어 죽을 쒀 먹는 때였다. 이런 것들은 맛으로 먹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흔히 구황 식품이었으니, 보릿고개가 한창이어서 배곯아 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까지 생기는 음력 사월쯤이면 토끼가 먹는 풀인 ‘명왓대’까지 동이 오르자마자 끊어다가 데쳐서 죽을 쒀 먹기까지 했다. 짐승이 먹고 죽지 않는 식물은 사람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또 이파리나 줄기에 그치지 않았으니 아까 말한 도라지 뿌리, 더덕 뿌리 말고도 칡 뿌리 ‘동구리’ 뿌리, 주로 돼지가 먹는 돼지감자, 고사리 뿌리, 모시 뿌리 같은 것까지 캐다 먹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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