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의 산문집이다. 제목이 특이해서 서가에서 뽑게 되었다. 바쁜 것이 게으르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바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다. 바쁜 세상에 맞추어 대부분 그렇게 산다.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볼 수가 없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 비슷한 무엇이 정신없이 사는 것이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게으른 것이고, 이런 게으름은 부도덕하고 반인간적이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에 나오는 글은 산업 자본주의 문명의 반인간성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시인의 생태론과 자연주의에 대한 신념은 거의 신앙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반성도 곳곳에 보인다. 글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 시인의 담백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진다.
글 중에 '하루를 정돈하는 괜찮은 방법'이 있다. 시인이 어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출강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늘 보아 오던 것들 중에서 오늘 새롭게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았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는가는 문학을 하는 청년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질문은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우리는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는 어떤가. 남들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내면과 이면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깨어 있기를 바란다면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오늘 처음 본 것이 없다면, 또는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대량 소비 사회의 완벽한 소비자일 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눈 먼 하루를 사는 기업의 충실한 노예라는 것이다. 관습이나 낡은 이념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두 눈을 똑바로 떠야 한다.
오늘 난생 처음 본 것과 새롭게 본 것을 중심으로 일기를 써 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 된다. 어느 날 시인이 쓴 내용은 이렇다.
오늘 난생 처음 본 것: 늙은 남자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문신. 오후에 회사 근처 대중 사우나에 갔다가 얼핏 보았는데, 오십대 후반 남자의 가슴에 길게 새겨져 있는 푸른색 문신은 처연해 보였다. 문신은 전적으로 젊음의 기호다. 그리고 젊음은 젊은 시절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오늘 새롭게 본 것:
1) 내가 늘 저지르는 결정적인 잘못은 내 잘못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내 잘못은 늘 복잡하게 꼬인다. 미성숙, 비사회화의 알리바이.
2) 나는 정말 지인들에게 무심하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아직 나의 결함으로 낙인찍히지 않은 까닭은 내가 지인들과 (경제적인) 이해 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친구를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돈을 꾸거나 꿔주는 것이라는 말은 정말 맞다.
3) 중년 사내들이 혼자 늦은 점심을 사 먹을 때, 메뉴를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오늘 새삼 확인했거니와, 나는 자꾸만 어릴 적 먹던 쪽으로 간다. 청국장, 멸치국수, 순두부, 추어탕..... 혼자 점심을 먹는 중년 사내라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가. 그래서 혼자 먹을 때만큼은 고급 레스토랑을 찾는다는 한 선배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나는 자꾸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어수룩한 밥집으로 스며든다.
4) <경제성장이 안 되면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밑줄 치며 읽고 있다. 저자가 뛰어난 시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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