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불교를 행(行)의 종교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때까지 불교를 마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 알고 있었다. 깨달음을 통해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열반의 세계에 드는 것이 불교를 믿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깨달음과 행이 분리된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의 행이 쌓여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정진하는 힘이 된다.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믿음이란 행이며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는 자비행, 보살행, 신수봉행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수봉행(信受奉行)이란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성경의 야고보서에도 나온다. 믿음이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가짜 믿음, 죽은 믿음일 뿐이다. 향을 품고 있으면 주변으로 향내가 풍길 수밖에 없다. 신앙인이라면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우리 내면의 믿음은 행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작은 선(善)이라도 우선 행하는 게 옳다.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종교인이 많아도 세상이 자꾸 험악해지는 이유는 기본적인 행의 실천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배려와 친절이며, 일상적이고 사소한 마음씀이다. 바른 행이야말로 신앙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다.
행(行)이 무엇인가? 가만히 앉아 있는 참선도 행이다. 각자의 신앙관에 따라 행의 범위가 다를 수 있다. 너무 믿음을 강조하다 보면 행을 무시하기도 한다. 잣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진다. 다만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일상생활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 더구나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언행이라면 그릇된 것이다. 나만이 진리라는 독선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종교는 그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사회 구조가 잘못되었다면 자신이나 가족의 안락만 구하는 것은 죄악이 될 수도 있다. 도둑질을 적게 했다고 더 양심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른 행(行)은 바른 지(知)를 전제로 한다. 제대로 알고 실천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운 숙제다.
실상 현대인은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모른다. 안을 보지 않고 밖으로만 정신이 팔려 있는 탓이다. 생각하고 닦아나가는 힘이 부족하다. 종교는 행(行)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며 노력이다. 듣는 것은 쉽지만, 바르게 알고 실천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