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므린 것들 / 유홍준

샌. 2014. 11. 18. 10:11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 있다

 

- 오므린 것들 / 유홍준

 

 

이 시를 읽으며 맨 처음 연상된 것이 고향 마을이었다. 집들이 산자락에 앉은 모양새가 바로 오므린 것이었구나. 오므린 것은 단순한 형상만 말하는 게 아니다. 엄마가 아기를 안은 자세도 오므린 모양이다. 태아도 오므리고 엄마 몸속에서 열 달을 보냈다. 오므림은 생명의 원모습이다. '오므리다'의 반대말은 '벌리다'이다. 크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벌려야 한다. 그러나 오므림이 없는 벌림은 위험하다. 언젠가는 오므림으로 돌아와야 한다. 오므림을 강조하는 사상이 노자와 장자가 아닐까. 오므린다는 건 평화를 지향하고, 작고 여린 걸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듬어 안고 나도 그들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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