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산 지 15년째다. 그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줄곧 층간소음에 시달렸다. 이사 올 때 윗집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남매가 둘 있었다. 윗집은 생활 패턴이 특이했다. 밤 11시부터 다음날 2시까지가 제일 움직임이 많았다. 뛰어다니고 떠드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사정을 하고 관리사무소를 통해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 가족의 생활 패턴이 쉬이 변할 수 없었다. 다시 집을 옮길 생각도 여러 차례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나도 소음과민증후군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런 식으로 버티며 지낸 게 어느덧 15년이 되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부터 뭔가 달라졌다. 한밤중 소음이 잦아든 것이다. 문을 쾅 닫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일도 드물어졌다. 모르는 사이에 윗집이 이사를 갔나 싶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분명 가족 구성원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천방지축 까불던 두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공부에 집중할 때니 조용해질 수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 귀가 어두워져서 그런 건가, 하고 테스트를 해 봤지만 귀에는 이상이 없다.
어쨌든 오래 스트레스를 받던 층간소음에서 벗어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다. 아무 염려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어 행복하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전에는 오늘 밤은 윗집에서 언제 시작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잠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면 환장할 지경이었다. 물론 매일 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살자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진리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이웃간의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흔하다. 더구나 지금은 이기심이 팽배하고 배려나 이해심은 줄어든 시대가 아닌가. 모두가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층간소음은 서로간에 얼굴을 붉히거나 그저 참아야만 하는 중간 단계쯤 어딘가에 있다. 가만 안 둬야지, 하다가도 한 번만 참아보지 하면서 세월이 흐른다. 나도 그렇게 지내왔다. 아파트 생활에서는 조용한 이웃을 만나는 것만큼 큰 복이 없다.
천만다행스럽게 나에게도 이웃에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웃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내 사는 집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졌다. 동시에 일말의 불안한 마음도 있다. 언제 다시 평화가 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피곤했던 10여 년이 있었으니 그 기간만큼이라도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오늘은 이 행운을 만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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