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별침을 권함

샌. 2018. 10. 27. 17:14

자식과 같이 살았을 때는 방의 여유가 없어 부부는 한방을 써야 했다. 남편이 코를 골아도, 아내가 잠꼬대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는 쉽게 잠이 드니 별문제가 안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잠귀가 밝아지고 예민해진다. 마침 그때쯤이 자식이 출가하게 되고 빈방이 생기니 부부는 서로 편하게 딴 방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아마 많은 가정이 그럴 것이다. 부부는 마땅히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초지일관 고집을 부리는 친구가 있지만 별 호응을 얻지는 못한다.

 

우리 부부도 각방을 쓰기 시작한 게 3년 정도 되었다. 잠을 잘 못 드는 아내는 전에도 거실이나 빈방에서 혼자 자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그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자식이 결혼하고 자연스레 방이 비면서 방 하나는 아내의 침실이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서로의 수면 리듬이 달라서였다. 잠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어긋나니 상대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자잘한 게 신경 쓰이니 숙면에도 방해가 되었다.

 

부부가 같은 집에 살면서 다른 방을 쓰며 지내는 상황을 가리키는 적당한 용어가 없다. 그래서 별침(別寢)이라 붙여 봤다. 별거(別居)는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을 뜻하니 경우가 다르다. 사전에는 '별침'이 '대궐에서 임금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이라 나와 있지만 차용해서 써도 괜찮겠지 싶다. 왕과 왕비의 처소라는 의미니 더 좋다.

 

젊은 부부가 별침을 하면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 나이쯤 되면 별침이 당연한 수순 같다. 직접 살아보니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 우선 자유롭다. 컴퓨터를 켜든, 음악을 듣든, 내 마음대로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깨면 책을 보기도 하고, 라디오를 듣기도 한다.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든 남편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둘 다 대만족이다. 아침에는 상대가 일어난 기척이 들리면 거실에서 만나 가벼운 포옹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잠자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특히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내 때문에 나는 더욱 조신해야 한다. 아내가 늦게 잠드는 날이면 아침 9시가 넘을 때까지도 가만히 기다린다. 나에게는 게으른 성향이 있으니 누워서 빈둥거리는 건 몇 시간이고 기꺼이 즐길 수 있다. 아마 같은 침실을 쓴다면 짜증을 냈을 것이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하루 지낸 일을 다정스레 얘기 나누며 두 손을 고이 잡고 잠드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신혼부부라면 모르겠지만 우리 연배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식에서 해방되고 나면 부부는 감추었던 기질이 드러난다. 함께 공유하던 부분이 많던 생활에서 각자의 독립적인 영역이 넓어진다. 이 시기에는 서로의 생각과 삶이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지나치게 밀착하려고 하면 귀찮아지고 다툼이 생긴다. 새로운 부부 관계를 위해 별침이 필요한 이유다.

 

더 늙어서 힘이 빠지면 다시 같은 방에서 자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그때까지 아픈 데 없이 해로할 수 있다면 행복한 부부다. 살아보니 무엇보다 마음이 편한 게 최고다. 가까이 붙어서 아웅다웅하느니 적당히 떨어져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지내는 게 훨씬 낫다. 심지어는 졸혼(卒婚)도 하나의 시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여자들이 더 용감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부부나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숙기에 접어든 부부의 변함없는 애정전선을 위해서 별침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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