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샌. 2019. 4. 21. 15:57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여자, 오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여자, 지난밤도 편치 않았던 것일까, 아파트 모서리 중국단풍 아래에서 연방 담배를 피워대는 여자, 채 달아나지 못한 연기 꼬리에 또 연기를 더하는 여자,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듯 연방 연기를 토해내는 여자, 처음 볼 때는 거북했으나 날이 지나면서 연민으로 다가오는 여자, 어쩌다 보이지 않는 날이면, 웬일일까, 조금 걱정도 되는 여자, 걱정과 함께 담배 연기가 그 여자의 거친 날들을 모두 거두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치 오래된 관성처럼, 이제는 중국단풍만 봐도 떠오르는 그 여자

 

-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태도에서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난다. 당당한 남자에 비해 여자는 조심스러워하면서 가능하면 자신을 은폐하려 한다. 그 때문에 여자가 담배를 피울 때 일부러 못 본 척 피해준다.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내 시선으로 부담을 주는 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담배에 나는 관대한 편이다. 30여 년 전 직장에서 10년 정도 아래인 여자 후배 K가 있었다. 동문끼리의 술자리에서는 상호 맞담배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자주 보는 풍경은 아니었다. 여자가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배우처럼 멋있었다. K가 있어야 술맛도 더 났다. K는 담배 피우는 예쁜 모습으로 기억된다. 당시 사무실에는 책상마다 재떨이가 있었다. 당연히 남자의 전유물이었다. 아마 후배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뻐끔 담배를 했을 것이다. 학생 앞에 서면서 입 냄새에는 또 얼마나 신경을 썼을 것인가. 여자로 사는 고충에 대해 그때는 거의 자각하지 못했다. 동문과의 열띤 대화에도 그런 주제는 없었던 것 같다. 영민한 K는 그뒤에 대학교수가 되었다. 정년을 마치고 퇴직하게 되면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는 게 꿈이라던 K는 아직도 그 꿈을 간직하고 있을까. 지금 아파트에서도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석진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가끔 보인다. 남자는 길 한가운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꺼내지만, 여자는 으슥한 데로 숨는다. 내가 퇴직할 때쯤에는 학교 구내가 전부 금연구역이 되었다. 10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에 교문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하면 건물 뒤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숨어서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학생한테 들키면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가. 여자의 담배 피우기도 비슷한 심정일 것 같다. 그래도 세상은 변해서 담배 피우는 남자 역시 밖에서나 안에서나 천덕꾸러기다. 길거리에서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적지않게 볼 수 있다. 꽁초 버리지 않고 침만 뱉지 않아도 대견하다. 모임에 나가면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애연가가 있다.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면 담배 피우러 나간 것이다. 어지간한 실내는 모두 금연구역이다. 제일 반가웠던 게 작년부터 당구장도 금연구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기원, 당구장너구리 잡는 소굴이었다. 애연가에게는 집안에서도 재털이 비워오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리울지 모른다. 지금은 담배 연기를 조금만 맡아도 독가스 마신 듯 질겁을 하지만, 옛날에는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 간접흡연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겨울에는 담배 연기로 매캐했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다 모여서 연기를 뿜어대니 오죽하겠는가. 그런 방에서도 잘 뛰어다니며 놀았고, 할아버지는 아흔이 되도록 건강에 지장 없으셨다. 담배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적다 보니 사설이 길어졌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옛날에 담배를 근심초라고 불렀듯 니코틴이 울화통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한 대 물면 근심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나는 담배를 끊었지만 어쩌다 슈퍼에 가서 담배와 라이터를 살 때가 있다. 몇 달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 시의 '담배 피우는 여자'를 연민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나도 가끔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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