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잃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늙어가면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것도 적응할 수 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 감성이 매말라가는 걸 느낄 때는 한숨이 나온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드라이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그대로 두면 얼마 안 가서 황폐해질 것 같다.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의 시를 만나면 반갑다. 시인이 쓴 <한글로의 여행>을 읽어 보면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가득함을 알 수 있다. 일본 여성 시인으로서는 특이하게 역사의식과 비판 정신을 소유한 분이다. 윤동주의 시를 일본 교과서에 싣는 데 앞장선 분이기도 하다.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시인의 호령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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