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한국은 노래방 / 김승희

샌. 2019. 4. 3. 09:26

당신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에게 노래를 부를 것을

권한다 강요한다 애소하고 명령한다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있어 본 적 있는가

당신은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사람

DMZ를 만드는 사람

수원지에 독극물을 붓는 사람

성수대교를 무너뜨리는 사람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바로 그, 그, 그 장본인이 된다

 

길은 이것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남겨두고 노래방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노래를 부르라고 부르라고 잡아끄는

친구들의 팔목을 절단해 버리고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당신은 체제 부정자가 된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노래부르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니면 노래를 권하는 친구들의 끈질긴 권유에 항복하여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지만 한 곡조 마지못해

불러 본다

(당신은 그 순간 자랑스런 한 패로 승격된다)

 

노래방 바깥으로 홀로 나간다

노래방 바깥의 번쩍이는 네온 붉은 조명이

밤도 별빛도 다 삼켜버린 천지

눈물을 문지르며 그대는 깨닫는다

노래방은 만유에 편재하고

노래방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노래방 체제가 한국의 유일한 체제이며

그 바깥에는 다른 어떤 체제도 없다는 것을

 

- 한국은 노래방 / 김승희

 

 

나이가 60대를 넘어 늙어가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노래방에 갈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전처럼 술만 먹었다 하면 2차로 노래방에 가자고 부추기는 친구가 이제는 없다. 어쩌다 바람을 잡더라도 대부분 심드렁하다. 어찌 흥이 예전 같겠는가. 나이듦에 감사하는 일이다.

 

노래방을 누가 만들었는지 원망을 많이 했다. 젊었을 때는 술 마신 후에 노래방을 어떻게 피할까가 최대의 스트레스였다. 붙잡혀 가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만한 고역이 있을까. 차라리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난한 노하우를 찾아냈다. 같이 들어가서 박자를 맞춰주는 척하다가 타이밍을 잘 살펴서 슬며시 나오면 된다. '의리 없는 놈'이라는 비난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몇 번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열외로 내놓는다.

 

우리 사회가 점차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정치권력은 예외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저와 제 집단의 이익 챙기기에 몰두한다. 철 지난 이념 논쟁은 단골 메뉴다. 술 취해 들어간 노래방처럼 '한 덩어리의 광란'이다. 그 장단에 놀아나는 국민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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