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화양연화 / 김사인

샌. 2019. 5. 7. 14:49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날은 간다'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열역학 제2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사뭇 무자비해 보이지만 이것만큼 공평한 것도 없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고 열역학 제2 법칙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진시황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제 수명마저 단축했다. 찬란한 봄이 가듯 우리는 낡아져서 사라진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봄이 오고, 온 봄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물질 순환의 과정이다. 서럽지만 눈을 훔치고 가만히 바라보라. 가는 봄이 있어야 짧았던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이 또한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 아닌가. 그러니 너무 서러워 마라. 지금 이 자리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