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낮술

샌. 2020. 4. 21. 16:45

낮술 맛을 알게 된 건 퇴직하고 난 뒤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낮술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술은 퇴근한 뒤 저녁에 마시는 거였다. 여러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직장 얘기를 안주 삼아 스트레스를 푸는 게 대부분이었다. 술맛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니 낮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심심하다 보니 반주로 몇 잔 홀짝이게 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이 직장 다닐 때와 다른 점은 시간상의 차이와 함께 대작하는 사람의 유무다. 대개 혼자이고 가끔 아내가 앞에 앉기도 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은 조용한 가운데 술맛을 느끼면서 취해가는 과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내 낮술을 방해하는 것은 바깥에 있지 않다. 기분 좋다고 연달아 낮술을 즐기다가는 이내 위장에서 신호가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약약'의 박자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 하느님은 지나치지 말라고 내 몸에 자동 브레이크 장치를 장착해 주신 것 같다. 조심스레 낮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달콤한지 모른다.

낮술에 된통 당한 적이 있다. 6년 전쯤일 것이다. P 선배와 등산을 하고 내려와서 점심 식사를 겸해 반주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따뜻해진 탓인지 취기가 올라오면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버스 안에 난리통이 나 있었다. 토한 오물로 버스 바닥은 엉망이 되었고, 사람들은 코를 쥐고 원망 어린 눈빛을 보내며 내리고 있었다. 버스는 운행을 중단하고, 승객들은 다음 버스를 타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사건 뒤로 술을 끊었고, 대여섯 달까지는 잘 버텨냈다.

밖에서 술을 마시면 집에서와 달리 폭음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예순이 넘어서는 어느 정도 절제하는 편이다. 낮의 반주로는 딱 소주 한 병이 적당하다. 당구팀과 게임을 하는 날은 통닭에 소주 한 병을 미리 한다. 당구는 얼근히 취해야 더 재미있다. 이 역시 낮술의 즐거움이다.

오늘은 걷기 위해서 밖에 나가려 했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 포기했다. 비 오는 날처럼 바람 부는 날에도 술 생각이 난다. 아내한테 전을 부쳐 달라고 했더니 마침 감자가 있어 잘 되었다면서 감자전을 부쳐 준다. 집에 있는 오미자주를 반주로 흥겨운 낮 시간을 보냈다.

술이 적당히 들어가면 근심 걱정은 저 멀리 사라진다. 세상이 온통 내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 눈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알코올 몇 잔으로 등산하는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마약 효과는 더 강렬하다는데 소프트한 마약은 한번 경험해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합법화가 될지, 과연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외출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은 지 두 달이 훨씬 넘었다. 코로나19 핑계를 대고 있지만 이런 은둔이 내 체질에 맞는 게 분명하다. 시끌벅적하게 무리와 어울리기보다는 '고독한 산보자'로 살고 싶다. 적적할 때는 낮술이라는 친구가 있다. 창밖으로는 구름이 경주하듯 흘러가고, 산의 나무들은 흥겹고 격하게 춤을 춘다. 낮술의 여운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어찌 유쾌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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