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낮에 나온 반달

샌. 2020. 5. 31. 11:12

오후에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원 모양의 달이 또렷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에서 물상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태양과 달의 운동 단원이었던 것 같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선생님, 달은 낮에 볼 수 없나요?"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볼 수 없지. 낮에 달이 떠 있어도 하늘이 너무 밝기 때문에 달은 안 보이는 거란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눈치챘다. 명색이 과학을 전공한 선생이 낮에 뜬 달을 본 적이 없었다니. 아니, 봤더라도 그러려니 했지 앎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라는 고정관념에 묻혀, 낮에 달이 안 보이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라는 아름다운 가사의 동요가 있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딸랑딸랑 채워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짝발에 딸각딸각 신겨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곱게 빗겨줬으면

 

질문을 한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음속으로는 이 동요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잘못된 답변을 수정할 기회가 없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나왔을 때 반달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진 탓인지 낮보다 더 밝고 선명했다.

 

달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다. 보름 전후 일주일 정도를 제외하면 낮에도 볼 수 있다. 다만 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이어야 눈에 잘 띈다. 우리가 낮에 뜬 달을 자주 볼 수 없다는 건 그만큼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40년 전, 낮에 나온 달을 궁금해하던 그 아이는 스스로 답을 찾았을 것이다. 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을 뿐임을. 달이 씁쓸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자꾸 나를 따라왔다. 그 아이를 만난다면 웃으며 용서를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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