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여래가 '나는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진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수보리여, 결코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여래에게는 괴로움에서 건질 중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래에게 괴로움에서 건져야 할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생각, '죽지 않는 나'라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라는 생각, '숨 쉬는 나'라는 생각이 있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스스로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밝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있는 나'가 참으로 있다고 여깁니다. 수보리여, 저 밝지 못한 사람 또한 여래는 '밝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밝지 못한 사람이라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 금강경 25(교화할 중생이 없는 교화, 化無所化分)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뭇 생명체 및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있는 모습도 없는 모습도 다 허망하니,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입니다." 어떤 길을 통해야 이런 궁극의 끝에 이를 수 있을까? <금강경>을 읽으면서 명료해지기보다 점점 더 아득해진다.
'나 없음'을 의식할수록 '나'는 더 드세게 살아난다. 굴복을 시키려 할수록 내면의 충돌은 격해진다. 내 힘으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나는 허깨비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나'가 없다는 부처의 선언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와 힘이 있는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에게 2천 년 전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이렇게 말했다. "신과의 합일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그렇게 태어났다." 불성(佛性), 또는 신성(神性)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길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