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여래는 거룩한 모습을 갖추었기에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래는 거룩한 몸 모습을 갖추었기에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사람은 모든 것의 끝남과 없어짐을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사람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의 끝남과 없어짐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금강경 27(끝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어, 無斷無滅分)
두 번째 대목에 주목한다. 번뇌에서 해방되는 게 깨달음의 목적은 아니다. 세속의 온갖 망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그 너머에 있다. 끝나거나[斷] 없어지는[滅] 것을 초월한다. 의식한다면 이미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불교는 바탕 자리부터 전복시킨다. 끊어지면서 끊어짐을 부정하고, 없어지면서 없어짐을 부정한다. 불교는 '나'를 잃으라고 한다. '나'를 읽음으로써 '나'를 찾는다. 기독교식 표현으로는 '거듭난 나'와 공통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나 없는 나', <금강경>은 이 메시지를 전하려는 반복되는 변주인 것 같다.
<중용>에 나오는 구절이다. 방법은 달라도 지향점은 하나이지 않을까.
"자기 자신의 참다운 모습, 즉 자연이 준 인성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됨을 성(性)이라고 부르고,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는 깨달음을 명(命)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자기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참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을 알아냈음을 말함이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자아를 찾아낸 자만이 하늘이 그에게 준 사명을 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