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행복론 / 최영미

샌. 2010. 10. 28. 14:52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행복론 / 최영미

 

행복이란 무엇인가? 몇 개 공감이 가는 구절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냉소로 읽힌다. 시인의 성향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고뇌와 고민 대신 일신의 안락을 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는 아예 무관심한 세상에 대한 시인의 반행복론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실에서는 속물이 되든지, 아니면 눈귀 닫고 산속으로 숨어드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자신을 오래 들여다보거나 답 없는 질문을 하는 건 잘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금기사항이다.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요사이 내 말년 병장의 심정이 꼭 그렇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헉헉거릴 정도로 힘겨운데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한 순간이었다. 사는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지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대를 한다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 정현종  (2) 2010.11.11
가족 / 진은영  (2) 2010.11.03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0) 2010.10.21
가을의 전설 / 안도현  (0) 2010.10.13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0) 2010.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