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모두 걸려넘어질 것입니다. 성서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로다'라고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한 다음 그대들에 앞서 갈릴래아로 갈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했다.
"모두 걸려넘어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대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더 힘주어 말했다.
"함께 죽어야 하더라도 결코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모두 그렇게 말했다.
- 마르코 14,27-31
최후의 만찬 자리는 침통한 분위기였다. 죽음을 예고하는 스승 앞에서 말로는 함께 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들은 내심 떨리고 두려웠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며칠 사이에 폭풍처럼 밀려온 사건들에 어리둥절하고 경황을 차리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예수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며 희망의 미래를 그렸을 제자들은 낙담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마르코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나약하고 비겁하다. 복음서의 기자가 일부러 강조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스승을 부인하고 등을 돌렸다. 자고로 뜻을 함께 한 공동체에서 이런 케이스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말씀을 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이 세세한 부분까지 다 결정이 되어 있는 듯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인류 구원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그친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를 배반한 가롯 이스가리옷도 자신의 역을 연기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위대함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명을 자각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베드로가 새벽에 세 번이나 자신을 모를 것이라는 등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 기자가 쓴 문학적 수사의 하나로 보고 싶은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유대 당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제자들도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당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예수는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이 사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