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우리에게 영혼이 남아 있는 걸까

샌. 2010. 3. 17. 08:42

<소꿉>은 놀이운동가 편해문씨가 인도와 네팔을 오가며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담은 사진집이다. 지난해에 이 책을 내고 나서 몇몇 사람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책엔 그저 무표정하게 가만있는 아이들 사진이 꽤 들어 있는데 이게 무슨 놀이 사진이냐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진들을 포함하여 책을 발간한 이유는 그 또한, 아니 우리 현실에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놀이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이니 놀이캠프니, 놀이도 상품화하다 보니 적어도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노는 아이들이구나 싶다. 그러나 빠르고 센 놀이가 있듯 느리고 부드러운 놀이도 있다. 혼자, 혹은 동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별다른 목적도 내용도 없이 느리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며칠 전 충청도 어느 시골 고개를 넘다 눈에 들어온 풍경에 가슴이 저렸다. 외딴집 툇마루에 두 아이가 나란히 걸터앉아 땅에 채 닿지 않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먼 산 보는 아이를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만일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한참 먼 산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 평화로운 풍경을 훼방할세라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나칠까?


사람이 복잡한 존재인 건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수치로 계량할 수도 없는 참으로 모호한 것이지만, 영혼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영혼의 상태로 좌우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아무리 초라한 처지라 해도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아랑곳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도 영혼이 결핍된 사람은 외롭고 허무해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몸이 아이 시절에 성장하듯 영혼의 크기와 깊이도 아이 시절에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종교 활동을 하거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고르듯 이런저런 영성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영혼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잠시 위무할 순 있으되 영혼의 크기와 깊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영혼은 아이 시절의, 상업적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없는 놀이 시간에,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명박이니 반이명박이니 수구니 개혁이니 꽤나 치열하게 미래를 도모하는 듯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일찌감치 영혼을 거세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지구를 휘감은 신자유주의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그 승리의 요건은 삶을 경제적 기준으로 얼마나 효율화하는가, 즉 삶에서 영적 시간을 얼마나 도려내는가에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그런 요구를 아이들에게 이토록 철저하고 잔혹하게 적용하는 사회는 없다.


아이들은 놀 시간의 대부분을 사교육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며, 참으로 눈물겹게 확보한 자투리 시간들마저 교활한 연예산업 자본가들과 게임산업 자본가들과 통신산업 자본가들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한국인들은 소를 잡아 고기는 물론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먹어치우는 걸로 유명한데 한국 아이들이 바로 그 짝이다. 한국에서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매일같이 그 잔혹극 속으로 밀어넣으며 말한다. ‘이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나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우리에겐 아직 영혼이 남아 있는 걸까?

 

- 먼 산 / 김규항, 한겨레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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