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03]

샌. 2010. 1. 17. 17:56

그대는 우물 안 개구리 얘기를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 개구리는 동해의 자라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

"나는 즐겁다네!

한번 뛰어올랐다 하면 우물 난간에 오르기도 하고

우물 벽돌이 빠진 구멍에 들어가 쉬기도 하며

물에 뛰어들면 겨드랑이를 붙이고 턱을 들 수도 있다네.

진흙에 엎어지면 발이 빠지고 발등이 묻히기도 하지만

장구벌레와 게와 올챙이를 둘러보아도

내 능력을 따라올 자 없지.

또한 한 구덩이의 물을 제 맘대로 하고

우물의 쾌락을 독차지한다네.

그대는 어찌 때때로 와서 관람하지 않는가?"

이에 동해의 자라는

우물에 왼발을 밀어 넣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끼어버렸다.

이에 뒷걸음쳐 물러나와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해 주었다.

 

子獨不聞 夫坎井之蛙乎

謂東海之오 曰

吾樂與

出跳梁乎井幹之上

入休乎缺추持崖

赴水則接腋持이

蹶泥則沒足滅부

還간蟹與科斗

莫吾能若也

且夫단一壑之水

而跨치坎井之樂

夫子奚不時來入觀乎

東海之오

左足未入

而右膝已집矣

於是逡巡而却

告之海曰

 

- 秋水 9

 

추수 머릿부분에 이어 우물 안 개구리 비유가 다시 나온다. 우물 안 개구리란 누구나 생각하는 대로 더 넓은 세계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을 가리킨다. 모른다기보다는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바깥으로 향한 문을 모두 닫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사림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특정 종교의 교리에 갇혀 그것만을 유일한 절대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물 안의 세계가 주는 위로와 즐거움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즐겁다!"[吾樂與]는 외침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들에게 우물 안은 낙원이며 행복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불행한 것은 더 넓은 세계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고 한 차원 더 높은 정신적 비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물 밖의 세계를 부정하기 때문에 배타적이면서 자신들과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적인 인식의 범위가 확장되어 온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우물로부터의 탈출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또 다른 우물 속에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우물 안의 존재임을 아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이다. 바다의 자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자랑을 아니꼽게 여기지 않고 우물에 발을 넣어 보았다. 그런 마음 바탕이 되어야만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바다의 큰 즐거움'[海之大樂]을 누릴 수 있다. 그 즐거움은 우물 안 개구리의 즐거움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니체의 글에도 이런 바다의 이미지가 나온다. '인간이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스스로 더러워지지 않은 채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인간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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