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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어제 밤, 퇴근하는 길 가로등 불빛을 받은 나무 그림자가 벽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물체의 그림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길 위에 또는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 특히 앙상한 나무 가지가 만드는 그림자 무늬에는 자주 발길을 멈추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 비유로 그림자 현실과 이데아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우리네 삶이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더 높은 차원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림자가 주는 이미지는 특별하다.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 하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罔兩이 景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景이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

사진속일상 2003.12.06

한가한 오후

한가한 오후 시간이다. 창 밖의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금새라도 비가 내릴듯 하다. 하늘은 연한 잿빛 도화지같다. 긴 붓에 무지개빛 물감을 묻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즐거워 할 그런 그림이면 좋겠다. 텅 빈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따스하다. 달콤한 향이 오늘따라 특히 고맙다. 근 한 달 가까이 술과 커피를 멀리 했다. 속이 아파서 식사도조심하며 지냈다. 가끔씩 속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향이 그래서 고맙고 향기롭다. 사실 산다는게 별 것아니지 싶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내적 만족이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반짝이는 보석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곳에 숨어있는지 모..

길위의단상 2003.12.05

겨울 나무 아래서

겨울 나무 밑에 앉아 있다. 벌거벗은 나신(裸身)이지만 부끄러움은 없다. 편안하다. 고개를 드니 나무가지가 그리는 기하학적인 선의 그림이 아름답다. 세 나무가 공중에서는 서로 뒤엉켜 마치 한 몸인 듯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겉치레를 버린 겨울 나무는 솔직하고 단순하다. 무척 가벼울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추운 계절을 견뎌내려는 스스로의 엄격함이 있을 것이다. 통하는 것이 남녀간에 정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나무 사이에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통하는 기운이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 이른 봄에 후배와 축령산으로 야생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돋보기와 청진기를 들고 왔다. 산에 가는데 왠 청진기인가. 정신없이꽃 사진을 찍다가 둘러보니 친구는 나무 하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

사진속일상 2003.12.04

창경궁 회화나무

창경궁에 있는 300여살이 되었다는 회화나무이다. 안내문에 보면 창경원 시절에 수많은 관람객들의 손에 가지가 꺾이고 시달려 수형이 이렇게 불균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세월의 풍파를 견딘 나무의 품위는 더욱 당당해 보인다. 끈질긴 생명력과 바위와 같은 과묵함이 거목에서 느껴진다. 일본에는 나이가 5천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삼나무의 일종이라고 한 것 같다. 한 생명체가 우리 나라역사와 맞먹는 세월만큼 살아왔다니 절로 감탄이 난다. 그 나무 앞에서는 누구라도 경배를 하게 될 것 같다. 그 긴 침묵의 세월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가.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오만한 짓거리는 이제 그만 뒀으면 좋겠다.

천년의나무 2003.12.03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

시읽는기쁨 2003.12.02

침묵의 달

12월의 첫 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 달을 `침묵의 달`로 불렀다고 한다. 12월로 시작되는 겨울은 침묵의 계절이면서 휴식의 계절이다. 쉼없이 일하던 자연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계절이다. 무수한 잎들을 대지에 돌려주고 나무는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이 겨울을 맞는다. 뭇 생명들도 분주하던 삶을 멈추고 안식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점점 차가와지는 날씨에 사람들도 몸을 움츠리며 따스한 방과 가정의 품으로 모여든다. 겨울은 바쁜 삶 속에 묻혀 보지 못하던, 듣지 못하던, 망각하고 있던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절이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게도 된다. 어둠과 침묵의 가치가 다시 되살아 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와 너무 많은 이론들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게..

길위의단상 2003.12.01

김칫독을 묻으며

오늘 아침 고향 마을은 늦게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고향집 뒤 야산의 나무들도 아침 안개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어제는 어머니, 동생네 식구들과 같이 겨울 김장을 담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터에 들러 집 뒤안에 김칫독을묻었다. .................... 눈 내리는 날, 집 뒤안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그런 그리운 집이 될 수 있을려나..... ...............................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사진속일상 2003.11.30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4년 전 농촌 마을 한가운데에 터를 잡을 때 여러 사람들이 걱정했다. 도시 생활을 하다가 시골 마을 가운데에서 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도시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생활에 젖어 있다가 모든 것이 노출되는 시골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를 했다. 가능하면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 덜 간섭받는 장소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도시 아파트 생활의 장점이자 단점이 고립성이다. 대개의 경우 한 가구 한 가구가 서로 고립된 섬이다. 옆 집에 신경 쓸 일도 없고, 옆 집으로부터 간섭받지도 않는다. 이것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안락함으로받아들일 수도 있고, 이웃과의 단절로 느낄 수도 있다. 당시에는사람들의 걱정을 무시해 버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면 된다고 그쪽 환경에 눈높이를 맞추고 산다면 문..

참살이의꿈 2003.11.29

어느 가을날, 산을 오르다가만난 나뭇잎은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둘러보니 다른 잎들도 마찬가지였다. 숲은 아름답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없는 마음이란 없다. 그러나이런 불완전함과 아름다움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잎들이 모여 나무을 만들고,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온갖 생명체들이 숲 속에 깃들여 산다. 그러할 수 있음은 이런 상처가 생명을 기르기 때문이다.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이런 저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상처는 아프지만 두려워하고 기피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그런 상처를 보듬어 안고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를 결합시켜 조화있는 유기체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우..

꽃들의향기 2003.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