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6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 김기택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

시읽는기쁨 2019.11.16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시읽는기쁨 2017.12.17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꿈뻑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가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소 / 김기택 소나무는 한민족의 상징이다.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무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소만큼 소중한 가축도 없다. 소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소'나무와 '소'가 무슨 연관이 없을까, 고민..

시읽는기쁨 2015.10.26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

시읽는기쁨 2009.03.30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더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지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

시읽는기쁨 2008.10.23

바퀴벌레는 진화중 /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시읽는기쁨 200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