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10

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

시읽는기쁨 2019.08.25

이 느림은 / 정현종

이 느림은,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워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앎과 느낌과 표정이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낌은.... - 이 느림은 / 정현종 그러고 보니 '느림'과 '느낌'이라는 두 단어는 많이 닮아 있다. 진짜 느낌은 느리게 찾아온다는 뜻인지 모른다. 알게 될수록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고, 진짜 앎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15장에 옛 성인을 묘사한 이런 말이 나온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客.....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알 수 없으니 드러난 모습으로 억지로 형용을 하자면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

시읽는기쁨 2016.09.18

좋은 세상

지난달에 영국으로 연수를 간 조카가 외국 생활의 일면을 가끔 전해준다. 런던에 방을 얻고 세간살이를 장만하는 것부터 한국과 비교하면 너무 늦어 불편하다고 하소연이다. 인터넷을 신청했더니 일주일 만에 와서 설치해 주더란다. 너무 느린 나라에 오니 적응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게 사는 한국 사람이 불쌍해 보이더라고 말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음지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보인 것이다. 얼마 전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보험회사에 연락했다. 기계음이 들리면서 위치 추적을 허용하시겠느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10분 뒤에 바로 기사가 도착했다. 있는 곳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신속 정확도 좋지만 너무 잽싸니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 제일이라고 할 만하..

참살이의꿈 2015.10.07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 윤재철

바퀴는 몰라 지금 산수유가 피었는지 북쪽 산기슭 진달래가 피었는지 뒤울안 회나무 가지 휘파람새가 울다 가는지 바퀴는 몰라 저 들판 노란 꾀꼬리가 왜 급히 날아가는지 바퀴는 모른다네 내가 우는지 마는지 누구를 어떻게 그리워하는지 마는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고독한지 바퀴는 모른다네 바퀴는 몰라 하루 일 마치고 해질녘 막걸리 한 잔에 붉게 취해 돌아오는 원둑길 풀밭 다 먹은 점심 도시락 가방 베개 하여 시인도 눕고 선생도 눕고 추장도 누워 노을 지는 하늘에 검붉게 물든 새털구름 먼 허공에 눈길 던지며 입에는 삘기 하나 뽑아 물었을까 빙글빙글 토끼풀 하나 돌리고 있을까 하루해가 지는 저수지 길을 바퀴는 몰라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 -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

시읽는기쁨 2013.09.25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즐겁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유쾌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시간을 재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행복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몸에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에도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건강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다투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연에게 다정해진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진정한 평화.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지구를 계속 사랑하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우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나다. -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2001년에 일본에서 '분발하지 않기 운동'이 일어났었다. 이와테 현의 지사를 지낸 마스다 히로야 씨가 이끈 운동으로, 다른 지역..

시읽는기쁨 2013.08.23

국도 / 윤제림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탈것 하나가 세상 모든 탈것들을 줄줄이 멈춰 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 꽃상여 하나, 찻길을 막아놓고서는 제 자신도 솔밭머리에서 제자리걸음입니다. 시동을 끄고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무는 버스 기사를 보고 레미콘 트럭이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 소리에 놀란 깃발과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흘러내립니다. 버스 기사가 차에 오릅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새댁 하나가 품에 안은 아이 손을 붙잡고 빠이빠이를 합니다. 멈췄던 차들이 가던 길을 갑니다.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코란도, - 국도 / 윤제림 "비스타리 비스타리", 4000 m 높이의 히말라..

시읽는기쁨 2010.01.27

완행열차 /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국화 애틋이 숨어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했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상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는 모를 뻔했지 - 완행열차 / 허영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는 고향을 오갈 때면 늘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는 작은 시골역까지 찾아 쉬면서 느릿느릿 달렸다. 지금 감각으로는 달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한데 고향까지 가는 데는 거의 7 시간이 걸렸다. 또 마음 착한 완행열차는 교행하는 기차가 있으면 한없이 기다려줄 줄도 알았다. 바깥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하..

시읽는기쁨 2009.03.13

느리고 어수룩한

정화조가 고장난 것이 한 달여 전인데 기사분이 그저께야 찾아왔습니다. 수리 요청한지 6주 만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그동안 똑 같은 말이 저와시공자 사이에 오갔습니다. "이번 토요일에도 사람이 안 나왔어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다음 번에는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한 일이 끝난 것입니다. 저의 집을 지은Y건축회사 사장님은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늘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사업을 하시는 분 같지 않게 느릿느릿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이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단점이라면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화조 수리도 부탁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웃집의 경우는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주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밉지가 않습니다. 웃는 얼굴..

참살이의꿈 2005.05.09

청소부 베포

옛 수첩을 뒤적이다가 보니 ‘모모’에서 옮겨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모모’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다. 베포 할아버지는 원형경기장에서 살고 있는 열 살 소녀 모모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작은 키에 허리는 구부정하고 흰 머리칼에 안경을 쓰고 있는데 초라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그의 직업은 도로 청소부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물어봐도 대답 대신 웃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을 듣는데 어떤 때는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만큼 그는 생각이 깊다. 대답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침묵을 지킨다. 그런 그를 이해해 주는 ..

읽고본느낌 2005.02.16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빨리 빨리가 미덕이 되었고, 분주함은 일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현대 문명의 속도전에 이유도 모른채 내몰린 힘없는 병사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쁜 일상의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저녁 어스름, 고향의 초가 지붕 위로 느릿느릿 피어오르던 연기를 떠올리면 나는 슬프다. 바삐 달려오기만 한 내 이 자리는 어디인가?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시읽는기쁨 200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