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6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나그네 / 박목월 이 시가 써진 1940년대 초는 일제의 수탈이 극성을 부릴 시기였다. 감옥에 갇힌 애국지사들도 많았고, 피를 토하듯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지은 시인들도 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도 이 시기에 나왔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고 너무 낭만주의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밀밭 길' '술 익은 마을' 등 풍요를 상징하는 어구는 당시 민중의 삶을 배반한 느낌마저 든다. 이 시는 학창 시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한때 나의 애송시였지만 시대 상황과 연관시켜 보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박목월은 1970년대..

카테고리 없음 2023.03.03

노루귀(3)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노루귀를 많이 보았다. 이른 봄에 피는 노루귀는 숲속의 요정이라 할 수 있는데 곱고 귀여운 요정들을많이 만나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노루귀 꽃 색깔은 흰색, 연분홍색, 청색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청색 노루귀다. 사람들은 청노루귀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노루귀는 깊은 색깔이 인상적인데 산에서 청노루귀를 만날 때면 늘 박목월의 시 '청노루'가 생각난다. 청노루귀를 보면 한 마리 외로운 청노루가 푸른 하늘을 말갛게 바라보는 것 같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내가 희구한 것은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는 맑은 눈이었다. 시인이 이 시를 썼을 때의 마음..

꽃들의향기 2010.04.14

윤사월 /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윤사월 / 박목월 아마 이맘 때였을 것이다. 동두천 산골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였는데 창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두 시간만 지나면 노랗게 송화가루가 쌓였다. 그 연노란 병아리 색깔의 송화가루가 고단했던 군대생활과 대비되어 무척 슬프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마 이 시가 떠올랐을 것이다. 군대 막사가 아니었더라면 무척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눈먼 처녀'에서 눈이 멀었다는 것과 처녀라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을 표상하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 대하여 눈이 멀고,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은 존재 자체가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적막한 봄날의 슬픈 풍경이 아니라 인간..

시읽는기쁨 2008.05.08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 서 남 북으로 틔어있는 골목마다 수국색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기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 무슨 일을 하고 싶다 - 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

시읽는기쁨 2007.03.02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동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가정 / 박목월 아버지가 그립다. 이젠 찾아볼 길 없는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가 그립다. 지금 아..

시읽는기쁨 2004.11.26

춘색(春色)

터에 다녀오는 길은 봄으로 가득했다. 사계절이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과 아름다움이 있지만 일년 중 지금 이 때만큼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취하게 하는 때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터의 집 앞에 앉아서, 또는 오고가는 길에서 봄의 향기에 취하고 또 취했다. 몇 장의 사진을 남겼지만 마음의 감흥을 어찌 다 옮길 수 있을까? 세상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무척 아름답다.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지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즘의 섶, 밤, 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

사진속일상 200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