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홍 8

가장 짧은 시 / 서정홍

아랫집 현동 할아버지는 몇 해째 중풍으로 누워 계신 할머니를 혼자 돌보십니다. 밥도 떠먹여 드려야 하고, 똥오줌도 혼자 눌 수 없는 할머니를 힘들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요양원에 보내면 서로 편안할 텐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이웃들이 물으면, 딱 한 말씀 하십니다. "누 보고 시집왔는데!" - 가장 짧은 시 / 서정홍 고향 마을에 계신 어르신들도 대부분 몸이 불편하시다. 중노동이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주변에 제일 많이 생기는 게 노인 요양원이다.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쩔 수 없이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요양원에 들어간다. 자식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부가 같이 사는 집은 어느 한쪽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끝까지 버텨내는 걸 본다. 이 시에 나오는 현동 할아버지도 그렇다. 시(詩)가 멀리..

시읽는기쁨 2014.06.25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내가 이 꼴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와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닮아야 할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시를 접하니 농부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어진다. 자본주의 시대지만 그래도 아직은 착하고 순수한 농심(農心)이 어딘가에는 살아있을 것만 같다. 이 시는 같은 이름의 시집 에 실려 있다. 시집에는 이런 시도 있다. 혼인하고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도둑님 다녀가셨다. 가난한 살림살이 가져갈 것이 없었던지 장롱 옷장 서랍장 가리지 않고 온통 뒤적거려, 방 안 가득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큰아들 녀석 학비 보내고 몇 천 원 남은 경남은행 통장과 생활비 몇 만 원 남은..

시읽는기쁨 2014.01.22

다시 논밭으로 / 서정홍

마을 회관에 보건소 소장님 오셨다. 조그만 가방 안에 설사약 감기약 위장약 피부약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아무래도 돼지고기 먹은 게 탈이 났는갑다. 온종일 설사하느라 일을 할 수 있어야제. 이런 데 먹는 특효약 없나?" "특효약이 어디 있소. 나이 들수록 조심조심해서 먹는 게 특효약이지." "나는 허리가 아파 똥 누기도 힘들고 온 만신이 다 아픈데 우짜모 좋노." "수동 할매,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소? 쇠로 만든 자동차도 오래 쓰모 고장난다 카이. 그만큼 살았으모 아픈 기 당연하지. 안 아프모 사람이 아니라요." 보건소 소장님은 안 아픈 데가 없는 산골 마을 늙으신 농부들의 몸과 마음을 도사처럼 훤히 꿰뚫어 본다. 그리고 단돈 구백 원만 주면 약도 주고 주사도 놓아 준다. 보건소 소장님 다녀가..

시읽는기쁨 2013.11.29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

시읽는기쁨 2012.09.22

농부시인의 행복론

"아들아, 간디학교 졸업하면 대학 가지 말고 아버지랑 농사지으며 살면 좋겠구나." "아버지, 걱정 마세요. 사람이 제 먹을 곡식을 제 손으로 짓는 일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친구들과 농부가 되자고 약속했어요. 젊었을 때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나서 말이에요. 그러니 학교 졸업하고 당장 농부가 되지 않더라도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아셨죠?" "여태껏 배웠으면 됐지, 무어 그리 배울 게 많나. 어쨌든 농부가 된다니 기다려야지. 그런데 농부가 된다는 말은 믿어도 되는 거지?" "아 참, 아버지는 아들 말을 못 믿으면 누구 말을 믿으세요?" "그렇지, 아들 말을 믿어야지. 믿고말고." 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내용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사람은 무섭다. 보통의 먹물들은 말과..

읽고본느낌 2010.10.05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설레는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일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음에 또 기다려 주는 일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기다리기를 잘 못한다. 며칠 전이었다. 후배 Y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왔다. 나는 불 같이 화를 내었다. 나는 시간 약속 못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도대체 벌써 몇 번째야, 후배는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내에게 주로 화를 낼 ..

시읽는기쁨 2010.10.04

마지막 뉴스 / 서정홍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막 들어온 긴급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짓고 살아가던 몇 안 남은 늙은 농민들이, 농사일 힘에 버거워 자기 먹을 농사만 짓기로 결의하고 파업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칠레, 세계 모든 농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마구 들어오던 수입 농산물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도시는 거의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도시 큰 상점뿐만..

시읽는기쁨 2009.04.23

우리도 쿠바의 새들처럼 / 서정홍

쿠바에는 새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더라 쿠바에는 개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더라 해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다 길가에 서 있는 옥수수도 골목마다 핀 노란 해바라기도 잔디밭에 누워서 까닭 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학생들도 훤한 대낮,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인을 안고 있는 젊은 경찰도 모두 자유롭고 행복하게 보이더라 '저렇게 살갗이 검을 수가 있을까' 싶은 아가씨와 '저렇게 살갗이 하얄 수가 있을까' 싶은 사내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허름한 집을 보고 그들이 입고 다니는 낡은 옷을 보고 가난하다고 말한다. 못 산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않았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

시읽는기쁨 200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