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회관에 보건소 소장님 오셨다.
조그만 가방 안에
설사약 감기약 위장약 피부약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아무래도 돼지고기 먹은 게 탈이 났는갑다.
온종일 설사하느라 일을 할 수 있어야제.
이런 데 먹는 특효약 없나?"
"특효약이 어디 있소.
나이 들수록 조심조심해서 먹는 게 특효약이지."
"나는 허리가 아파 똥 누기도 힘들고
온 만신이 다 아픈데 우짜모 좋노."
"수동 할매,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소?
쇠로 만든 자동차도 오래 쓰모 고장난다 카이.
그만큼 살았으모 아픈 기 당연하지.
안 아프모 사람이 아니라요."
보건소 소장님은
안 아픈 데가 없는
산골 마을 늙으신 농부들의 몸과 마음을
도사처럼 훤히 꿰뚫어 본다.
그리고 단돈 구백 원만 주면
약도 주고 주사도 놓아 준다.
보건소 소장님 다녀가시고 나면
한 며칠 동안
마을 회관은 잠잠할 것이다.
농부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경운기를 몰고 호미와 괭이를 들고
이른 새벽부터 논밭으로 달려갈 것이다.
- 다시 논밭으로 / 서정홍
시골 할매 할배들은 다 골병이 들어 있다. 옆집도 뒷집도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용하다는 소문이 난 시내 의원은 늘 문전성시다. 원장 선생이 사람이 좋다는 게 첫째 이유다. 어떤 푸념도 다 받아주는 모양이다. 주사 한 대가 약효 이상의 효과를 낸다. 아픈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외로움이다. 시골 할매 할배들이 아픈 몸 이끌며 논밭으로 나가는 건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그래도 할매 할배들만의 삶의 행복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 지팡이를 짚든, 유모차를 밀든, 논밭으로 나가는 기쁨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도시의 공원, 지하철역에 모이는 패잔병 같은 노인들보다는 훨씬 낫다. 적어도 며느리 눈칫밥은 먹지 않는다. 허리는 구부러졌어도 당당하게 살아 있다.
부모 세대가 지나면 농촌은 어떻게 변할까? 아기자기했던 소농 시대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전통적인 농업은 이제 숨을 거두어가고 있다. 고향에서도 논농사는 전부 대형 기계에 의한 기업농의 손에 넘어갔다. 호미와 괭이로 짓는 산골의 밭농사만이 겨우 노인 농부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내가 다닐 때 학생이 천 명 가까이 되었던 초등학교는 지금은 폐교를 걱정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는데 언젠가는 소농이 복원되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리는 농촌 마을을 상상해 본다. 할매 할배들은 손주 재롱을 보며 노년의 여유를 즐기리라. 그때가 되면 옆 마을에 세워진 5층짜리 요양원 건물도 허물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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