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13

다읽(18) - 데미안

20대 때 읽은 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 늘 궁금하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는데 아쉽게도 그때의 느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책을 읽으며 확인했다. 50년 전이니 기억한다는 게 도리어 이상할지 모른다. 하물며 데미안이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싱클레어이고 데미안은 그의 멘토며 구원자다. 또는 싱클레어 내면에 있는 영혼의 목소리로 볼 수도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맞다. 은 자아를 깨뜨리고 새로운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소년의 구도기라 할 수 있다. 독립된 인간으로 서려는 청춘의 성장통..

읽고본느낌 2023.07.22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강도야 다..

시읽는기쁨 2023.06.06

푸르른 틈새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로 1996년에 발표한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작가의 10대, 20대, 30대의 삶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어느 작가나 첫 작품은 이야기 전개나 구성이 미흡할지라도 풋풋한 느낌이 들어 좋다. 더구나 성장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젊은 시절로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에서 작가는 손미옥으로 나온다. 서른한 살의 미옥은 눅눅한 단칸 지하방에서 이사를 가려고 한다. 이사는 한 삶의 종착이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사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소녀와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교대로 나오면서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으며 커간다...

읽고본느낌 2021.10.29

다읽(10) - 좀머씨 이야기

20년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좀머씨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좀머씨에 연민을 느끼면서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씨의 외침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내 마음 상태가 좀머씨와 닮은 바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는 좀머씨 개인의 불행보다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서 더 비중 있게 읽힌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 따스하게 읽힌 이야기였다. 특히 화자와 관련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재미있고 공감이 되었다. 두 개의 에피소드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카롤리나와, 미스 풍켈이라는 피아노 선생님에 관계된 일화다. 둘 다 어떤 상실감과 관련되어 있다. 잔뜩 기대했던 카롤리나와의 만남이 깨진 허전함, 그..

읽고본느낌 2021.05.05

빨간 머리 앤

코로나로 집에서 칩거하면서 넷플릭스에서 찾아본 캐나다 드라마다. 시즌 3까지 27부작으로 되어 있다. 모두 보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1908년에 나온 몽고메리 소설의 원제는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인데,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Anne with an E'다. 앤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한 말인데 앤의 성격을 잘 드러낸 제목인 것 같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드라마가 원작의 분위기를 얼마나 잘 재현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무척 재미있게 봤다. 뒤에 소설을 읽으면 오히려 감흥이 깨어질까 두렵다. 드라마의 배경은 19세기 후반의 캐나다 동부에 있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다. 이 섬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마릴라와 매슈 남매가 사는 초록 지붕 집에 앤이 들어오면서 얘기가 시작..

읽고본느낌 2020.12.01

벌새

올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 나의 올해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1994년,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은희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영화다.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가 있었던 해다. 김보라 감독의 연출력이 탄탄하고, 특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진지하면서 따스한 시선이 좋다. '벌새'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영지 샘이다. 은희를 진정을 다해 이해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학원의 한문 강사를 넘어 인생의 스승, 멘토라 부를 만하다. 은희는 영지 샘을 만났기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영지 샘은 서울대를 휴학한 운동권 학생이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는 소녀에게 주는 격려와 충고 이상의 인생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평생 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영지..

읽고본느낌 2019.12.02

위로받고 싶은 날들

다른 이의 살아온 궤적 흥미롭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산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있고, 내가 걸어온 길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인생의 길이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 가 보지 못한 길이 더 멋있게 보인다. 은 조재호 선생의 자전소설이다.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난 뒤 본인의 일생을 정리한 글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같은 교직에 있었던 분이라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학교와 사회의 범생이였던 나와는 딴판이었다. 파란만장의 불꽃 같은 삶이 책 속에 있었다. 선생은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멋대로 살았을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했을 수도 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는 소위 노는 아이들이 서너 명은 있었다. 그..

읽고본느낌 2017.12.13

트리 오브 라이프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래도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이 뭔지 뚜렷이 잡히지 않는다. 가족 간의 갈등과 치유를 다루는 것 같은데 우주적 차원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난해해져 버렸다.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해석하려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욕심이 지나친 것 같다. 단순한 걸 어렵게 그려내는 재주가 감독에게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좋다. 머리는 복잡하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현실 너머의 깊은 신비의 세상이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특히 아름다운 영상 표현이 압권이다.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에 나온 장면 70개가 모자이크 되어 있다. 영화는 초반부에 우주와 지구가 탄생하는 과정이 길게 나온다. 이 장면은 마치 장대한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감독은 우주의 탄생과 ..

읽고본느낌 2011.11.15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내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반문한다. 현실적인 경제학자는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 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재난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미 차례차례 빙산에 부딪치고 있는 중이다. 는 우리에게 저 위험한 바다를 보라고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타이타닉호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는 1949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처음 제시되었다. 미개발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정책이었다. ‘미개발 국가’라는 용어도 이때..

읽고본느낌 2011.09.15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나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 우리가 ..

시읽는기쁨 2008.05.31

가치관의 반전

남자에게도 폐경기가 있다고 한다. 나이 50 전후로 해서 겪게되는 육체적, 정신적 급변 현상은 남녀에 공통인 것 같다. 이 시기는 육체적으로 노쇠 현상이 나타나고, 생리적으로도 호르몬의 분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는자녀의 성장과 독립, 안정된 일자리의 상실 위험, 가정에서 아내의 위상 증가 등의 요인이 겹쳐 이 시기는 정신적으로 좌절과 방황의 때이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희망의 시기라고도 할 수가 있다. 내 경우는 40대 후반부터 심각한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우울증으로 시작되었으나 뒤에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생의 의미를 회의하고 묻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가톨릭에 입교했고, 노자와 장자 철학에 빠져들었다..

참살이의꿈 2007.09.19

제 2의 인생

아이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KFC다. KFC 치킨 가게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와 내가 비슷하다고 이놈들이 생각한 모양인데 한 아이에게 물어보니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유감이지만 기분 나쁜 별명은 아니다. 아이들의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믿는 편이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 이미지가 긍정적인 데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근래 사람들이 내 인상에 대해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체로 부드럽다거나 여유가 있어 보인다, 또는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물론 거기에는 외교적 언사도 있겠지만 그렇게 비호감인 사람은 아니다라는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동료들로부터 피부 얼짱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흰머리만 아니면 훨씬 젊어..

참살이의꿈 2007.05.06

삶의 전환기에서

살다 보면 인생에도 매듭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인생 역시 비연속적인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개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런 매듭을 분별해 내지만 어떤 때는 인생의 흐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채기도 한다. 특히 한 매듭에서 다음 매듭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사람은 지나온 삶과 현재를 비교하며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예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변화란 새로움과 성숙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의 전환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내적 갈등이다. 기존의 삶의 태도를 수정한다는 것은 한 세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번민과 고통을 수반한다. 새로 얻게 될 것의 의미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기..

참살이의꿈 2007.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