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내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반문한다. 현실적인 경제학자는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 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재난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미 차례차례 빙산에 부딪치고 있는 중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저 위험한 바다를 보라고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타이타닉호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는 1949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처음 제시되었다. 미개발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정책이었다. ‘미개발 국가’라는 용어도 이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발전’이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에 주목한다. 서양의 경제제도에 들어있지 않은 나라들은 모두 ‘미개발’이라 부르는데 이 속에는 미국 이외의 모든 문화, 민족, 사회, 경제제도가 다 포함된다. 지구 위의 자연이나 문화, 사람의 방식을 서구 중심으로 획일적으로 개편하는 게 바로 ‘발전’의 뜻이다. 세계화란 착취와 폭력의 다름 이름에 불과하다.
경제가 발전하면 빈부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오히려 빈부격차가 더 심화되고 있다. 또 경제발전 사상 속에는 풍요에 대한 이미지가 숨어 있다. 돈으로부터 생기는 힘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자신이 돈을 모으든가, 주위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면 된다. 기술이 생기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처음에는 부자만이 산다. 그것이 차츰, 좋다가 아니라 없으면 곤란한 것이 되어간다. 살 수 없는 사람은 그것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된다. 이 빈곤의 특징은 경제발전이나 기술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생산된다. 기술발전에 따라 새로운 빈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10%에서 20%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미국의 빈곤층이 지난 60년간 아무 변화가 없는 걸 보아도 명확하다. 어제 보도로는 최근 미국의 빈곤층 숫자가 4620만 명으로 통계를 작성한 지난 52년 동안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경제성장이 결코 빈부격차를 줄이지도 못하고 모두를 부자를 만들 수도 없다. 모두가 부자로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지구가 견디어내지 못한다. 만약 전 지구인이 현재 미국인의 에너지 소비를 한다면 지구가 다섯 개 있어도 모자란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세계의 모든 가정이 자동차 한 대씩을 가지고 있다면 석유는 채 일 년을 지탱하지 못한다고 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란 허망한 꿈일 뿐이다.
빈곤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빈곤’이다. 이것은 자급자족 사회를 가리키는데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그것으로 만족한다. 가지고 있는 것과 필요한 것 사이의 차이가 그다지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 정도의 생활로 좋다고 생각한다. 바깥에서는 가난하게 보더라도 자급자족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는, 세계은행이 말하는 ‘절대빈곤’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약이 모자라고, 입을 옷이 없어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셋째는, 부자의 전제가 되어 있는 빈곤이다. 어떤 사회 속에 경제력이 있는 부자가 있으면 그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무력한 사람들이 다수 있기 마련이다. 그 사회 안에서는 부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부자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다. 넷째는, 기술발달에 따라 새로운 필요가 만들어지고, 거기로부터 새로운 빈곤이 탄생한다. 일리치는 이를 ‘근원적 독점’이라 불렀다.
20세기의 경제발전이란 이 네 종류의 빈곤 가운데 첫 번째를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백 년전의 세계에서는 자급자족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상당히 많이 있었다.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좀처럼 착취하기 어렵다. 그런 빈곤을 착취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 바로 경제발전의 정체다. 세 번째란 인간을 노동자로 만드는 것, 네 번째는 인간을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이익이 나는 형태로 고쳐 만드는 ‘빈곤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저자는 경제성장이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로성장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파이가 커져야 돌아갈 몫도 커진다고 한다. 그러나 제로성장은 가난한 사람, 직장이 없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조, 곧 안전망 만들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상호부조의 사회, 사로 협력하는 살기 좋은 사회로 바꿔간다는 뜻이다. 엔진을 끄고 배를 세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제로성장은 물질만의 풍요가 아닌 참다운 의미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 정의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을 저자는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대항발전의 첫째 목표는 ‘줄이는 발전’이다. ‘대항발전’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곧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앞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경제활동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이는 것이다. 대항발전의 두 번째 목표는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 활동, 시장 이외의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들을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대항발전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다. 일중독과 소비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항발전은 물건을 조금씩 줄여가며,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기계를 줄이고 도구를 늘린다. 도구란 인간의 능력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의 증대시키는 기능을 한다. 텔레비전을 켜고 ‘문화’를 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창조한다. 기계로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악기를 다룬다거나 직접 춤을 춘다거나 연극을 만들거나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다보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능력,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의 내용을 짧게 정리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큰일 날 듯이 호들갑 떠는 소리를 매일 듣는다. 인구가 줄어든다고도 난리다. 이 책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세상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생명을 파괴하는 기계를 만들고, 폭력적인 국가를 용인하고, 생물을 무시해왔다. 냉혹하고 파괴적인 산업자본주의, 국가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인류의 미래가 있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따뜻한 생명 중심의 공동체는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문명의 전환기다. 문고본 크기로 책 분량도 작고 쉽게 씌어졌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