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9

어른의 일기

'어른이지만, 어른이기에, 어른이어서, 어른이라서' 일기를 써야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책이다. 지은이인 김애리 작가는 스스로를 '일기 장인'이라고 소개한다. 열여덟 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20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책 서두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차근차근 기록해나가는 일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요." 내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일기의 한 형식이라면 내 일기도 20년이 넘었다. 그 전에 노트에 썼던 일기는 많이 사라졌고 일부만 남아 있다. 내 일기의 역사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그러므로 일기를 예찬하는 지은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일기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자신의 감정에 정..

읽고본느낌 2024.08.27

급훈 뒤집기 / 박완호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는 별을 마주치게 되리 - 급훈 뒤집기 / 박완호 불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법연(法演) 선사가 세 제자와 함께 밤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자 사위가 칠흑으로 변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의 수행력을 알아볼 셈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시읽는기쁨 2023.10.10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비망록 / 문정희 비망록이란 그래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게다. 젊은 시절의 비망록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한 생애를 허둥거린들 어떠리. 아프고 흔들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새긴 별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시읽는기쁨 2021.03.27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곡성'에서 효진이 아빠에게 절규하며 부르짖는 말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 남아 있는 건 이 한 마디밖에 없다.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경찰인 종구는 악귀가 든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건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딸을 돕는다는 게 오히려 더 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악마와 한 편인 무당을 불러 굿을 해서 효진을 괴롭힌다. 마지막에는 딸을 살릴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만 좋았을 뿐 현상의 이면을 볼 줄 몰랐던 종구는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한다. 효진의 "뭣이 중헌디?"라는 외침이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종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열심히 산다는 게 결국 악의 세력에 복무하는 결..

참살이의꿈 2016.08.15

꼰대는 되지 말자

얼마 전에 굉장히 불편한 사람을 만났다. 벽창호를 대하듯 말이 안 통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전형적인 꼰대 타입이었다. 사전에서 꼰대는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 아버지,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로 나와 있다. 옛날 우리 때는 잘 썼는데 요사이 아이들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다. 꼰대의 특징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1. 자기 세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자기의 잣대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한다. 자기 기준에 맞으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흑백 논리로 내 편, 네 편을 가른다. 2.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에 꼰대가 많다. 옛것과 자신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젊은 세대의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젊은이들한테서 고리타분하고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3..

길위의단상 2015.02.12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어떤 관료 / 김남주..

시읽는기쁨 2011.08.26

아미엘의 일기

고독한 철학자 아미엘이 40여 년 동안 쓴 일기는 세계와 인생에 대한 한 개인의 명상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신으로 살면서세속적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영혼의 평화를 얻고자 했다. 맑은 영혼을 가진 그의 일생은 소박했고 청빈했다. 반면에 어쩔 수 없이 외롭고 우울한 측면도 있었는데 그것은 일기의 기본 색조로 나타나서 일기를 읽는 내내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아미엘에게 있어 일기는스스로 말한 대로고독한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자다.일기를 쓰는 행위는 펜을 든 명상이라고도 했다.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성찰하고 고뇌하는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밑줄을 치며 읽었던 '아미엘의 일기'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아래에 옮겼다. 다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왠지 일본어로 중역된 느낌이 자..

읽고본느낌 2009.06.23

이 시대를 사는 고민

전교조에서 주최하는 교양강좌를 신청했다. 지난주에 홍세화 님을 초대한 첫 번째 강좌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진보와 자아실현’이라는 제목으로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좌는 무척 유익하고 의미 있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극복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메모한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우리 사회는 20 대 80의 사회라 불린다. 상위 20%가 부의 80%를 독점하고 있는 양극화 사회다. 양극화의 정도는 미국, 멕시코와 함께 OECD 국가 중에서도 심각한 편에 속한다. 문제는 소외된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지배집단은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노예적 의식을 주입시켰다. 일제시대에는 황국신민화가, 해방 후에는 반공안보..

길위의단상 200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