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10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 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다음 또 다음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도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 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이유경 시인의 시집 을 샀다.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쓸쓸하다. 늙는다는 건 익숙한 것에도 자꾸 낯설어지는 것 같다. 사람도 장소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몇 차례씩 만나는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 ..

시읽는기쁨 2021.09.07

적응하기

딩동! "누구세요?" "실내 소독하러 왔습니다." 낮에 집에 있으면 현관 벨 소리에 응대해야 할 일이 가끔 있다. 방문자를 잘 파악해서 문을 열어줄지 말지를 빨리 판단해야 한다. 벨을 누른다고 다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정기 소독이야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지만, 무슨 말인지 분명치 않은 사람은 십중팔구 귀찮게 하는 사람이다. 대면하면 뿌리치기 쉽지 않다. 이번에 소독하러 온 아줌마는 50대 중반쯤 되었다. 배수구에 분무기로 소독액을 뿌리는 간단한 작업이다. "다 됐습니다. 아버님, 여기 사인 좀 해 주세요." 헐! 아버님이라고? 내가 80대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내 여동생보다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한테서 듣는 '아버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생경했다. 제일 황당했던 건 전철을 탔을 때였다. 경로석 앞..

길위의단상 2018.05.26

흐르는 시간

세월 참 빠르구나, 라고 의례껏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은 연말이다. 육십이 지나면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지만, 사실 그다지 실감을 못한다. 바삐 지내는 사람과 달리 주로 집에만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다. 이것도 나 같은 생활자의 느긋함이다. 시끄러운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으로 흐르는 불빛이 길었다. 어쨌든 한 해는 저물고 있고, 저 앞 어둠 속에서 새해가 힘차게 다가오고 있다.

사진속일상 2017.12.15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도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추억의 ..

시읽는기쁨 2012.04.03

세월의 강물이야 어떻게 흐르든

세월이 너무 빠르다. 퇴직 전에는 하루 보내기가 지겨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서 빨리 저녁이 왔으면 싶었다. 그만큼 낮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루는 느릿느릿한데 일 년은 금방 지나간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도 순식간이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이고, 점심을 먹으면 어느새 저녁이고 밤이다. 일 없으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나는 반문한다. 지루해져나 봤으면 좋겠다고. 구멍 뚫린 풍선에서 바람 빠져 나가듯 시간이 도망가니 여생의 무게가 깃털보다도 가볍게 느껴진다. 힘이 빠지니 스쳐가는 시간 쫓아가기도 벅차구나. 여윈 마음에 숨결만 가쁘게 허덕거린다. 그러나 샌, 빠른 세월에 쫓겨 너마저 조급할 필요는 없는 거지. 발동이 걸린 세월이야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해. 너는 흐르는 ..

참살이의꿈 2011.08.08

억울하다

새해를 맞아 받은 휴대폰의 문자 메세지 중에서 제일 특이했던 것은 초등학교 동기인 J가 보낸 것이었다. 내용이 '경인년 새해가 밝아오네 벌써 또 한 살 더 먹는다 생각하니 억울한 생각도 드네'였다. 의례적인 기원이나 축하의 인사말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나온 '억울'이란 말이자꾸 신경이 쓰였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신년의 인사말로 쓰기에는생경하게 느껴졌다. J는 동기들 중 가장 성공한 친구다. 증권회사에 다니며 고위직에도 올랐고 주식으로 돈을 모아 강남에 빌딩도 가지고 있는 부자다. 몇 해 전에 퇴직했는데 모두가 부러워 할 정도로 삶의 여유를 즐기며 산다. 자식들도 잘 컸고 건강도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나을 정도로 관리를 잘 하고 있다.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행복하다고 해야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길위의단상 2010.01.02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일전에 동료들과의 등산길에서 망우리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묘소에 들렀다. 거기를 지날 때면 늘 시인의 묘를 찾는다는 S 형은 복분자 한 잔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어두웠던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술병으로 요절한 불행했던 시인 박인환.이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대표작이..

시읽는기쁨 2008.04.11

내 가슴이 폭삭 내려앉거나 말거나 / 윤희숙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그것이 인정사정 없이 꼬박꼬박 일수돈 챙기듯 내 나이를 챙기더니 이제 헤아려보기도 찡한 연수(年數)가 되고 말았다 귀밑에 흰 머리카락이야 돋았거나 말았거나 사랑하던 이가 뒤 안 보고 떠났거나 말았거나 그래서 마음이야 오래도록 아프거나 말거나 개나리는 피고 지고 산천에 흰눈도 쌓였다가 녹고 강물은 일도 없이 잘도 흘렀다 들판의 아찔한 풀향기에 내 가슴이 폭삭 내려앉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기쁘게 노래하고 꽃망울 터지듯 쑥쑥 자랐다 그대는 슬프지 아니한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 내 가슴이 폭삭 내려앉거나 말거나 / 윤희숙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세월은 흐른다. 친구여, 사랑하는 이가 돌아보지 않는다고 노여워 마라. 거울..

시읽는기쁨 2007.06.30

세월이 빠르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시간은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흘러간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어느덧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서 아쉽다. 우리들 인생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이 어제의 나인데 벌써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인생의 나이도 가을이 되면 시간축의 기울기가 훨씬 가팔라진다. 한 해를 지나는 것이 한 달처럼 짧게 느껴진다.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어린 시절 뛰어놀던 봄꿈이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뜰 앞의 오동잎이 이미 가을소리를 전하는구나 주희(朱熹)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끝 구절이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봄날 뜰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벌써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쓸쓸함이 지금의 내 심정..

길위의단상 200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