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6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65세가 되던 1993년에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프랑스 생장피도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 km에 이르는 길을 31일 동안 혼자 걸은 것이다. 이 길은 가톨릭의 순례길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를 따라 대서양까지 이어진다. 산티아고에 성 야고보의 시신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서기 1000년경부터 서쪽을 향해 순례 여행을 떠났다. 특히 중세 때는 순례 행렬이 대단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호이나키는 일리치의 추천으로 생애의 느지막이 이 길에 섰다. 은 한 달에 걸친 그의 순례 기록이며 신앙 고백이다. 호이나키는 에서 만났던 분이다. 젊었을 때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해서 중남미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일리치와 함께 ..

읽고본느낌 2010.11.05

그대 순례 / 고은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 그대 순례 / 고은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순례를 생각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단순성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몇 달씩 생계를 놓아도 그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난과 자유로움이 도리어 부러울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나는 한 번도 나를 찾는 순례에 나서본 적이 없다. 일상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육신을 먹여살릴 개나리봇짐 하나 메고 길 떠나본 적이 없다.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

시읽는기쁨 2007.04.13

언젠가는 / 제임스 카바노

언젠가는 떠나련다 자유로워지련다 무미건조한 것들을 지나 안전한 밋밋함을 떠나 연락처도 남기지 않으련다 황량한 광야를 가로질러 그곳에 세상을 떨구기 위해 아무런 근심 없이 떠돌련다 한가한 지도책처럼 - 언젠가는(Some Day)/ 제임스 카바노(James Kavanaugh) 새장 속에 새들이 있다. 그들은 새장 안에서 태어나 새장 안에서 죽는다. 그들은 새장 안 좁은 공간이 온세계라 알고 있다. 그중의 한 마리가 새장 밖의 세계를 꿈꾼다. 자유와 해방을 꿈꾼다.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를 만든 목적은 아니다.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할 때 배는 살아있다. 이 시를 읽으면 또한 갈매기 조나단도 연상된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보다는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자주적 사..

시읽는기쁨 2006.09.28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 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 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

시읽는기쁨 2005.01.17

[펌] 저 황금빛 들녘의 비애

경남 밀양의 가을 들녘을 걸으며 눈이 시리다 못해 충혈이 되도록 안부를 묻는다. 청명한 가을 햇살과 찬 서리를 맞아 속살부터 단맛이 차오르는 얼음골 사과의 표정으로, 그리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사자평 억새꽃의 이름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 그대는 정녕 이 가을에 행복하신가. 220일을 넘도록 걷고 걸으며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수상하고 수상할 뿐이다. 황금빛 출렁이는 저 들녘의 풍요는 어느새 풍요가 아니라 처절한 결핍이 되었다. 추수의 '감사'가 아니라 농산물 수입개방 문제 등으로 인해 생존권 사수의 '결사'가 되었다. 이따금 참새들이 날아와 벼이삭을 쪼더라도 화를 내는 척하지만 어느새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허수아비들의 여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의 ..

참살이의꿈 2004.10.26

길 떠난 사람들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이젠 잊어버린 고향 집을 떠나 와서 어딘가로 가고 있는 나그네들이고 순례자들이다.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길 위에 올라섰으니 무작정 걷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언가의 꿈을 쫓아 아니면 신기루에 희망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어느 길 모퉁이에서 남은 여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어진 신발에 다리를 절뚝이며 자꾸만 뒤쳐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런데 여기, 생명평화를 위한 탁발순례의 길에 나선 분들이 있다. 지난 3월에 지리산을 출발하여 3년 계획으로 전국을 순례하며 생명평화의 기운을 일으키려는 도법과 수경, 두 분의 스님이시다. 그리고 이분들 뜻에 동참하는 여러 사람들도 동행하..

길위의단상 2004.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