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28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길위의단상 2024.04.08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

이근후 선생의 5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사 제목에 나온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1935년생이니 지금은 9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선생은 건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 쓰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계시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고달프고 행복은 신기루다. 쉽게 사는 사람은 없다. 겉모습은 화려할지라도 속내는 누구나 쓰라리다. 다만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아갈 뿐이다. 원한이나 분노, 불안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작은 재미로 덮어둔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슬픔을 잊고 가능한 한 재미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조다. 평생을 인간의 아픔과 마주한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한 귀결일..

참살이의꿈 2024.02.21

천지가 다함이 있어도 시름은 다하지 않으니

"세계 평화를 위하여!" 젊었을 때 술자리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자주 외쳤던 말이다. 젊은 날의 치기였을 망정 그 시절에는 세계와 평화를 언급할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요즈음 젊은이들과는 달랐다는 말이다. 물론 이 시대의 젊은이를 비난하고 싶은 심정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각박한 생존 경쟁의 장에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고담준론이 먹여 살려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마저 공개적으로 '교육부가 경제부처이며 대학은 산업 인재 양성을 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누구를 나무라겠는가. 7, 80년대에는 지금과는 성질이 다른 울분과 저항이 있었다. 그때는 대의(大義)를 논하고 이상을 좇던 시절이었다. 그럴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심해지고 지식인의 우울과 시름은 짙어졌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

참살이의꿈 2022.06.28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히말라야와 산티아고를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졌다. 전에는 마음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몸의 문제다. 12년 전에 찍었던 히말라야 사진을 보면서 다시 그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바로 지금 내 심정이다. 이런 경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종내는 슬퍼할 수조차 없는 때가 찾아올 것이다. 늙음이든, 병이든, 집안의 변고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찌할 수..

시읽는기쁨 2021.04.24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셀프 염색을 지켜보던 남편이 세월에 순응하는 것도 지천명의 덕목 아니겠냐 길래 산수국과 동박새와 늙은 등대와 길고양이 랭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대꾸하고서 서릿발 내린 머리카락이 물들기를 기다리다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져 엊그제 엄마에게 다녀왔는데 몰라보더라고 자식이 둘도 아닌 딱 하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무래도 반백 때문인 것 같다고 실토하며 어깨 들먹이는 -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북카페 '시인의 집'에 들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가에 앉아 조천 해변을 바라보고, 탁자에 놓인 책도 뒤적이고, 시인과 작은 대화도 나누었다. 따스한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시인의 집' 입구에 이 시가 적혀 있다. 시인의 최근작이라고 한다. 찬찬히 읽어 보니 울컥하게 된다. ..

시읽는기쁨 2019.03.08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

시읽는기쁨 2018.12.02

팽목항과 무위사

가만히 있으라, 해 놓고는 자기들은 허겁지겁 탈출했다. 그러면서 발걸음이 떨어졌을까. 너무 어이없으니 그 뒤에 어두운 음모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울어진 선실에서 아이들이 천진스레 찍은 동영상을 보았다. 다가오는 마지막을 예감하지 못한 채 아이들은 끝까지 구조의 희망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물이 코 밑까지 차올랐고, 뒤에 발견된 아이들 손가락은 전부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팽목항에 찾아간 어느 날 저녁, 화나고 슬프고 많이 많이 미안했다..... 숨가쁘게 기다리다 끝끝내 접히고 만, 저 여리디 여린 꽃잎들에게 무슨 말을 드려야 할까. 태초로 돌아가는데도 말이 필요하다면 그 중에 가장 선한 말을 골라 공순하게 바쳐 올리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나는 사랑한다 미안하다 이..

사진속일상 2018.04.21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오늘은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찾아 읽는다. 옆 방에 들릴까 봐 혼자 작은 소리로 음송하니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특히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말씀에 울컥해진다. 세상만사 새옹지마가 아니던가. 궁(窮)이 통(通)이요, 통이 궁이다. 잔물결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 무슨 바람이든 고맙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갈 뿐이다. 바위처럼 진중해지자.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

참살이의꿈 2017.12.16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대며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사..

시읽는기쁨 2017.04.30

슬픔 / 정현종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 슬픔 / 정현종 37년 전 오늘 박정희와, 37년 뒤 박근혜의 지금 상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설마 그런 일이, 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높으신 분이 화를 내더니 며칠만에 현실이 되었다. 분노와 허탈 뒤에는 늘 슬픔이 찾아온다. 무엇보다 깜냥도 못 되는 것들에 의해 한 나라가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막힌 머리와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이 결합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돌아보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선택이었다. "영원한 건 ..

시읽는기쁨 2016.10.26

화인 / 도종환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

시읽는기쁨 2016.04.16

슬픔을 권함

슬픔을 권하다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다. 삶이 스산할수록 양지를 찾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걸 나무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어설픈 기쁨과 희망보다는 차라리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대가 잔인한 이유는 슬프고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리라. 늘 밝은 의지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을 강요하는 시대의 야만을 얼마나 더 견뎌내야 할까. 그렇다. 외로움과 슬픔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값싼 희망과 위로를 파는 약장사들은 슬픔을 외면한다. 슬픔에서 회피하는 방법을 떠들어댄다. 그러나 사람은 슬플 때 가장 인간적이 된다. 제대로 슬퍼할 줄 모른다면 인생을 깊이 있게 사는 게 아니다. 남덕현 씨가 쓴 은 가난, 고독, 소외, 죽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지..

읽고본느낌 2015.04.06

연장통 / 마경덕

장례를 치르고 둘러앉았다. 아버지의 유품을 앞에 놓고 하품을 했다. 사나흘 뜬눈으로 보낸 독한 슬픔도 졸음을 이기진 못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상자는 관처럼 무거웠다. 어서 짐을 챙겨 떠나고 싶었다. 차표를 끊어둔 막내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걸 어쩐당가, 마누라는 빌려줘도 연장은 안 빌려 준다고 해쌓더니.... 엄니는 낡은 상자를 연신 쓰다듬었다. 관 뚜껑이 열리듯 연장통이 열리고 톱밥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과 땀에 절은 아버지, 먹통, 끌, 대패, 망치를 둘러매고 늙은 사내가 비칠비칠 걸어나왔다. 몽당연필을 귀에 꽂은 아버지, 대팻밥이 든 고무신에서 고린내가 풍겼다. 자식 농사만은 대풍을 거두셨다. 망치는 부산으로, 톱은 서울로, 줄자는 울산, 말라붙은 먹통은 분당으로, 아버지는 그렇게 ..

시읽는기쁨 2014.08.08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그러면 풀들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발이 간지러운 풀들이 반짝반짝 발바닥 들어올리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아픔처럼 꽃나무들 봉지 튀우는 소리 들릴 것입니다 햇살이 금가루로 쏟아질 때 열 마지기 논들에 흙이 물 빠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어디선가 또옥똑 물방울 듣는 소리 새들이 언 부리 나뭇가지에 비비는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사는 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 있거든 슬픔과 기쁨으로 하루를 짜는 일이라고 그러나 오지 않는 내일을 위해 지레 슬퍼하지 말라고 산들이 저고리 동정 같은 꽃문 열 듯 동그란 웃음 하늘에 띄우며 봄 아침엔 화알짝 창문을 여세요 -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잔인하고 우울한 계절이 계속되고 있다. 온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둡..

시읽는기쁨 2014.05.10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 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 ........................................

시읽는기쁨 2014.05.02

생때같다

사고를 보도하는 TV 화면 자막에 '생떼같은 자식'이라는 글자가 뜬 걸 보았다. '생떼'는 잘못된 표기로 '생때'로 써야 한다. '생때같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람이)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여 병이 없다'로 적혀 있다. 사전에는 '생때'가 구체적으로 뭔지 설명이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제일 그럴듯한 해석이 '생때'를 '살아있는 대나무'로 보는 것이다. '생[生]'은 '살아있다'로 의미가 분명하고, '때'는 '대[竹]'가 된소리로 변한 것이다. 옛날 조선어사전에는 '생대같다'는 단어도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생대'가 '생때'로 경음화 되었다. 대나무는 성장이 빨라 하루에 수십 cm씩 자란다. 쑥쑥 성장하는 건강한 자식을 대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그러므로 '생때같은 자식'은 싱싱..

길위의단상 2014.04.28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한 구절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시가 있다. 이 시의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도 그렇다. 무언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이 구절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게 인생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슬픔..

시읽는기쁨 2014.02.22

웃으면서 화내자

, 제목 때문에 가끔 생각나는 책이다. 읽지는 못했어도 특이한 제목 때문에 기억에 새겨진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대표적이다. 웃으면서 화내는 기발한 방법이라도 있을까, 책을 펼쳐보기는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엉뚱한(?) 내용이어서 완독하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바보들에게 정색하고 화내는 건 똑같은 바보짓이다. 바보들에게는 웃으면서 화를 내줘야 한다. 얼굴로만 웃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날려주어야 한다. 그게 바보를 바보에 걸맞게 대하는 방법이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자!" 어제저녁부터 이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바보들에게 줄 선물은 이것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게 슬퍼질 때가 있다. 비바람을 뚫고 나가며, 결국은 평..

길위의단상 2014.02.04

식탁의 눈물

내일로 잡혀 있던 제주도행을 취소했다. 예약했던 숙소와 렌터카, 비행기표도 전부 해약했다. 이번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살 집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걱정하던 일이 앞당겨 일어났고, 이곳을 비울 수 없게 되었다. 사는 게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듯,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인생인가 보다. 하긴 인생이 내 뜻대로만 굴러가길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중에서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장애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이며 충동적이다. 모든 것이 남 탓이고 상대 입장을 헤아릴 줄 모른다. 성장 과정에서 정상적인 인격 발달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교실에는 이런 아이가 ..

길위의단상 2014.01.0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

시읽는기쁨 2013.08.16

팔원(八院)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 / 백석 동장군 기승이 대단하다. 지난 12월은 45년 만의 강추위였다. 새해가..

시읽는기쁨 2013.01.03

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이 슬픔을 팔아서 조그만 꽃밭 하날 살까 이 슬픔을 팔면 작은 꽃밭 하날 살 수 있을까 이 슬픔 대신에 꽃밭이나 하나 갖게 되면 키 작은 채송화는 가장자리에 그 뒤쪽엔 해맑은 수국을 심어야지 샛노랗고 하얀 채송화 파아랗고 자줏빛 도는 수국 그 꽃들은 마음이 아파서 바람소리 어느 먼 하늘을 닮았지 나는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 하날 살꺼야 저 혼자 꽃밭이나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하며 살꺼야 - 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슬픔이 얼마나 진했으면 시인은 슬픔을 팔아 꽃밭 하나 사고 싶다고 했을까? 슬픔을 살 사람은 없으니, 슬픔이 팔릴 리가 없다는 걸 시인도 잘 알 것이다. 슬픔을 팔겠다는 건 슬픔과 함께 하겠다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이때의 슬픔은 처음의 비탄이 아니라, 고운 꽃으로 승화된 슬픔이다...

시읽는기쁨 2012.08.18

골목 안 / 조은

실종된 아들의 시신을 한강에서 찾아냈다는 어머니가 가져다준 김치와 가지무침으로 밥을 먹는다 내 친구는 불행한 사람이 만든 반찬으로는 밥을 먹지 않겠단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더구나 자식을 잃어보지 않아서 그 아픔의 근처에도 가볼 수가 없다 웃을 줄 모르는 그녀의 가족들이 날마다 깜깜한 그림자를 끌고 우리집 앞을 지나간다 그들은 골목 막다른 곳에 산다 나는 대문을 잘 열어두기 때문에 그녀는 가끔 우리집에 와 울다가 간다 오늘처럼 친구가 와 있을 때도 있지만 얼마 전 가족을 둘이나 잃은 독신인 친구에게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멀고 낯설어 보인다 고통에 몸을 담고 가쁜 숨을 쉬며 살아온 줄 알았던 나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소멸한 슬픔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 골목..

시읽는기쁨 2007.06.26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인생은 고단하고 슬프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가리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외롭고 아픈 존재들이다.속을 감추려 우리는 양파처럼 수많은 껍질로 내면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

시읽는기쁨 2006.06.21

서러운 날

오늘은 왜 이렇게 자꾸 서러운 마음이 일어날까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맥이 탁 풀립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오늘은 모두가 생기를 잃었습니다. 저 밝은 하늘 때문입니다. 시간이 나면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봅니다. 색깔이 어쩜 저리 선명할 수 있는지, 초록의 나무들과 파란 하늘의 조화에 넋을 잃습니다. 오늘은 하루 내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것도 더 이상 맑고 투명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상상할 수 있는 그대로의 하늘이 열렸습니다. 탁한 도시의 하늘도 이런 기적을 연출할 줄 아네요. 오늘은 정말 일 년 중에서 며칠밖에 볼 수 없는 날씨일 겁니다. 오후에는 일찍 일을 접고 나왔습니다. 어디로든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활짝 펴고 걸을 수가 없..

참살이의꿈 2005.08.23

춥고 쓸쓸한 마가리

현관문을 여니 싸늘한 냉기가 밀려온다. 집안 공기가 바깥보다 더 차다. 발바닥이 시러워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스위치를 올리니 보일러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도물도 정상으로 나온다. 이번 추위에 바깥 수도펌프가 얼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안에서는 아직도 새 집 냄새가 난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커튼과 창문을 모두 연다. 겨울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유리창을 거친 햇살은 따스하다. 뒷 집 개가 마당까지 쫓아와서는 컹컹대며 짖는다. 여기가 자기네 집인지 아는가 보다. 웃기는 놈이다. 손짓으로 쫓아보지만 꿈쩍도 안한다. 오디오 전원을 넣는다. Secret Garden의 `Awakening`이 흘러 나온다. 애잔한 선율로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두 번째 곡은 `You rais..

참살이의꿈 2003.12.22

Learning to fall

가을은 떠나 가고, 떠나 보내는 계절인가 보다. 담안에 계시는 어느 분이 최근에 슬픈 일을 연달아 겪으셨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사망하고,경황이 없던 바로 그 날에 언니가 또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 분의 지금 심정이 어떠할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분에게 지금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우리 곁을 떠나간다. 아무 이별의 말도 없이, 무심히 떨어지는 저 낙엽처럼 그렇게 이 곳에서 사라져 간다. 그 분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같은 날 동시에 잃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밖에는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살다 보면 내 것이라 여겼던 애지중지하던 그 무언가를 상실하는 경험을 ..

길위의단상 200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