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11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시읽는기쁨 2024.02.25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

우주의 풍경 앞에서는 가슴이 뛴다. 요사이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조차 잊은 처지지만, 우주망원경이 보내오는 사진이 있어 허전함을 달래준다. 작년에 하늘로 올려진 제임스 웹은 허블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하고 있다. 얼마 전에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가 공개되었다. 아름다운 은하나 성운이 많지만 수레바퀴은하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원 이름은 'ESO 350-40'인데 생긴 모양에서 통상 '수레바퀴은하(Cartwheel Galaxy)'라 불린다. 수레바퀴은하는 우리은하에서 5억 광년 떨어져 있고, 지름은 15만 광년이다. 원래는 나선은하였는데 다른 은하와 충돌하면서 생긴 충격파가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호수에 돌이 떨어질 때 생기는 파문과 비슷하다. 충..

길위의단상 2022.09.14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지금 내가 숨 쉬는 한 호흡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인 적도 있고, 600년 전 세종대왕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시읽는기쁨 2019.08.11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

시읽는기쁨 2018.05.24

이게 뭐야? / 김사인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가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

시읽는기쁨 2017.11.15

봄눈 온다 / 황인숙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雪)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이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 봄눈 온다 / 황인숙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물질은 전체의 5%도 안 된다. 95%는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이다. 사람의 마음도 드러나 있지 않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안 보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실체는 그들이다. 눈에 보이고 감지되는 것은 존재의 극히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거대한 침묵 앞에서 그저 두려울 뿐.

시읽는기쁨 2016.02.23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 명장이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쓸 나무를 고를 때, 나무의 나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달의 위치까지도 고려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이 수평선에 낮게 떠 있고..

시읽는기쁨 2013.12.24

무지의 구름

뉴턴 역학이 학계를 풍미하던 18세기에 라플라스는 어느 특정 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의 운동 상태를 알 수 있다면, 그 뒤에 일어날 모든 현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만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우주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우주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 나타난 것도 필연적인 결과이며, 동시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 또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을 인간의 심리 영역에까지 확장시킨다면 다음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고 어떤 사건과 만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란 그런 결정된 것의 확인에 불과하다. 우연이란 아..

길위의단상 2007.10.15

신비한 힘

세상을 살다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오감으로 드러난 세계 외에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게 된다. 그런 것들 중에 심리학에서 동시성(Synchronicity), 또는 감응이라 불리는 현상이 있다. 이 신비한 현상을 최초로 규명한 심리학자는 칼 융(Carl Jung)이었다. 융은 어느 환자의 꿈에서 왕쇠똥구리 딱정벌레가 나오는 얘기를 듣던 중 창문을 두드리는 이상한 소리에 밖을 보니 그 지역에서 드문 왕쇠똥구리가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이 사건이 융을 기묘한 일치 현상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런 우연의 일치 현상은 누구나 일상에서 가끔씩 경험한다. 문득 옛 친구가 떠올랐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거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참살이의꿈 2007.05.30

신비체험과 임사체험의 불가사의

인간의 신비한 정신 현상 중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종교적 신비체험과 임사체험이 아닐까 싶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성인들, 그리고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그들이 경험한 종교적 신비체험이 늘 따라다닌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은 것으로 암시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돈오(頓悟)라고 부르는 깨달음의 순간도 이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종교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힌두교의 요가 수행자들에게서는 이런 체험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오랜 침묵이나 기도, 또는 은둔과 고행을 통한 감각의 제어에서 그런 체험은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찾아오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런 신비체험에서는 주로 빛과 소리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런 종교적 신비체험의 특징은 체험 후에 완전..

참살이의꿈 200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