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무지의 구름

샌. 2007. 10. 15. 15:55

뉴턴 역학이 학계를 풍미하던 18세기에 라플라스는 어느 특정 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의 운동 상태를 알 수 있다면, 그 뒤에 일어날 모든 현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만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우주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우주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 나타난 것도 필연적인 결과이며, 동시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 또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을 인간의 심리 영역에까지 확장시킨다면 다음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고 어떤 사건과 만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란 그런 결정된 것의 확인에 불과하다. 우연이란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필연일 뿐이고,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의 결정에 의한 것일 뿐이다.


고전물리학의 이런 기계적 세계관은 양자역학의 등장에 의해 붕괴되었다. 하이젠베르그는 관찰자가 입자를 관측할 때 그 존재 여부만 알 수 있을 뿐, 어디에 얼마만큼의 운동량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으므로 미래의 상태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의하여 우주 진행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던 낙관주의는 붕괴되었다. 물론 거시적으로는 뉴턴역학이 위력을 발휘하지만 우리 우주의 본질이 확률과 우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함께 절대적 가치관의 붕괴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골치 아픈 양자역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앞으로 인간의 지식이 확대되고 전체 우주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초슈퍼컴퓨터가 등장하면 인간의 미래도 예측 가능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우주의 본질이 그런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과정 역시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양자적 현상이다. 앞으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도 우리가 미래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우주의 진행이 기계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런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은 단순한 로봇에 불과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사실은 다행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생명이 가진 힘이며 축복이다. 앞으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독재자가 출현하더라도 이 생명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고 본다. 그가 완벽하게 모든 존재를 통제하는 것은 우주 원리상 불가능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시세계는 확률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거시세계에서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을 때 물리 법칙은 하나의 단일한 모양으로 완성될 것이다. 아마 그것을 궁극의 법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앞일을 모른다는 것, 즉 인간에게 무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재미없어 질 것 같다. 손에 땀을 나게 하는 운동 경기의 스릴도 없어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의 설렘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그늘이 있기에 우리는 빛의 화사함에 감격할 수 있다. 단지 희미하게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지력이 그 너머의 빛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한계성이 도리어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지의 구름은 신비며 축복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종교, 철학, 과학의 모든 지식이 하나로 통합되는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그때는 인간이 신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면서 진실 되고 겸손한 문명을 건설하는 전기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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