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4

나무처럼 /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우리도 그렇게클 일이다.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 나무처럼 / 오세영  기온이 뚝 떨어졌다. 눈을 뜨니 냉랭한 기운이 얼굴에 닿아 이불을 끌어올렸다. 가을을 제대로 즐기기 전에 겨울이 불시에 쳐들어 온 것 같다. 따끈한 믹스커피 한 잔을 감싸 쥐고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온기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삶이란 게 너무 소란하고 번잡하다. 벌판..

시읽는기쁨 2024.11.06

너를 찾는다 / 오세영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소리, 낙엽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귀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시읽는기쁨 2009.11.21

텅 빈 나 / 오세영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는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

시읽는기쁨 2007.11.10

길 / 오세영

어디로 가는 길이냐 돌다리 건너 회나무 숲 지나 위로 오르는 길 산딸기 어우러진 오솔길에선 기어가는 한 마리 뱀을 밟았다 돌아보면 길바닥에 나뒹구는 칡넝쿨 하나 산철쭉 우거진 모퉁이에선 불현듯 네 맑은 목소릴 들었다 돌아보면 푸두득 나는 뻐국새 하나 본 것이 본 것이 아니고 들은 것이 들은 것이 아닌데 보고 들은 것을 마음에 두고 길을 찾아 쉬엄쉬엄 산을 오른다 벼랑을 돌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산정의 무덤에서 끝나는 길 어욱새, 속새, 덥거나무 풀숲에서 사라지는 길 - 길 / 오세영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의 기적도 없다.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보다 더 신비한 일도 없다. 우리는 살아 있고, 그것만이 전부다.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날지..

시읽는기쁨 2007.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