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주 5

쏘주 한 잔 합시다

선 굵은 남성적인 글을 쓰는 유용주 님의 산문집이다. 치열하게 삶을 사시는 분답게 글에서도 불꽃 같은 뜨거움이 느껴진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온갖 궂은 일터를 전전한 경험이 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속에는 따스하고 섬세한 감성이 살아 숨 쉰다. 입담 좋은 분답게 글도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힌다. 체험에서 나온 글은 힘이 있다. 삶과 싸움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의 차이다. 나 같은 백면서생은 이런 분이 무척 존경스럽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낸 백전노장의 위엄 앞에서 주눅이 든다. 더구나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슬픔과 분노를 안으로 쌓아야 내공이 생긴다. 지은이에게는 삶 자체가 문학이다. 전에 나왔던 산문집 의 첫머리가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로 시작된다. 는 전작의 연장이..

읽고본느낌 2014.09.10

시마 / 유용주

그대가 없는 날에도 햇빛은 투명하고 고바우 슈퍼는 문을 열고 우체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꽃은 피어 바람은 불고 강물은 제 갈 길로 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병원과 약국과 술집과 터미널이 붐비고 붐비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마루는 빗자루와 걸레의 애무를 받고 의자 위로 두툼한 엉덩이들이 내려앉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연못의 물고기들은 은빛 지느러미를 흔들거리고 촛불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깜빡거리고 먼지도 눈을 뜨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장에선 배추와 무와 하지감자가 바구니 속으로 담기고 돼지와 소들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나가고 알몸둥이의 닭들이 펄펄 끓는 기름솥 속으로 투신을 하고 비듬나물과 상추와 풋고추와 옥수수와 멍게, 해삼, 오징어들이 좌판 위에 진열되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읽는기쁨 2011.10.31

[펌] 이런 마을을 꿈꾼다

이런 마을을 꿈꾼다. 뒷산은 그렇게 높진 않지만 위엄이 있고, 개울이 흘러 저 멀리 강이 보이는, 서남향이라 햇볕이 오래 오래 머무는, 감나무에는 홍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온갖 새의 먹잇감이 되어주는 그런 마을. 사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여울목에는 구름 한 자락 떠 있는, 동네 가운데쯤 디딜방아가 다소곳한, 키 큰 시누대가 휘파람을 부는 그런 동네를 그려본다. 처마 낮은 집집마다, 그 주인 닮은 개들이 꼬리만 흔들 뿐, 짖지 않는 동네, 견성한 개들이 탁발 나온 스님들과 막걸리 잔을 돌리는 주막이 있는 동구 밖, 두 사람 이상만 모여도 서로의 눈망울 속에서 산새 소리, 바람 소리, 개울물 소리를 읽을 수 있는 동네. 따스한 햇볕을 닮아, 뜨내기가 마당에 어슬렁대도 누구 하나 큰소리치지 않는 수더분한..

참살이의꿈 2011.02.16

붉고 푸른 못 / 유용주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러운 못,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어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은 그대의, 붉고 푸른 못 - 붉고 푸른 못 / 유용주 유용주 시인은 처음에 산문으로 알게 되었다. 어느 잡지의 최근호에서 시인의 감칠 맛 나는 글을 다시 만났다. 이건 유 시인의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인의 산문은 개성이 있다.소녀적 감성이 들어 있는 글에는 삶에 대한..

시읽는기쁨 2010.08.07

은근살짝 / 유용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지하 선생께서 나와 인생이란 은근살짝 다녀가는 것이라고 '은근살짝'은 '은근슬쩍'의 전라도 말로 모름지기 인생이란 소리 소문 없이 살다가는 것이 최고라고 자기처럼 시끄럽게(표시 나게) 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특유의 밑바닥 철학을 설파하셨는데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 행상선을 얻어 타고 여러 날째 수심 5,000m 인도양 새벽을 건너고 있을 때 누군가 뜨끈한 이마를 쓰다듬는 차가운 손길이 있어 소스라치며 일어났더니 바다보다 더 넓게 퍼진 하늘에 떠 있던 한 떼의 별무리 은근살짝 내려와 글썽이고 있더라 - 은근살짝 / 유용주 우연히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읽게 되었다. 밑바닥 삶을 절절히 체험한 시인의 글에서는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승화된 정신의 깊이가 느껴졌다..

시읽는기쁨 2008.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