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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소설이다. 작가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낸다고 한다. 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가 과거에 함께 일했던 켄턴을 찾아가는 6일 동안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티븐스로서는 달링턴 홀을 떠나 평생 처음 해 보는 여행이다. 중간중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여정과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품격'이다. 품격과 충성심, 성실, 명예 등을 빼놓고는 스티븐스를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븐스는 귀족을 섬기는 자신의 직..

읽고본느낌 2023.12.16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김형석 선생은 1920년생이니 103세가 되신다. 여전히 저술과 강연 등의 활동을 하는 노익장이 대단하시다. 선생은 우리들 대화 자리에서 노년의 본보기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이시다. 물론 이런 하늘이 내린 혜택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 선생이 행복을 소재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선생의 글은 평이하고 담백하다. 선생의 성격과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삶의 기본이 되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초등학생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에 담겨 있다. '약간 우울한 이야기'라는 글에서 선생은 늙는다는 것은 생활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나이가 들 수록 사회 공간은 없어지고, 활동 영역이 가정 공간으로..

읽고본느낌 2023.06.16

저 청소 일 하는데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젊은이들은 고민이 많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내 능력을 발휘할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일만 하겠다고 고집하다가는 생계가 문제 된다. 제일 현실적인 방법은 아무 일자리나 구해서 우선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틈틈이 하면 된다.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온다. 인생은 길다. 조급하게 덤비지 말아야 한다. 를 쓴 김예지 씨가 좋은 본보기다. 작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입사 시험에서는 번번이 낙방했다. 그녀에게 일을 맡기는 데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 청소 일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의 아가씨가 빌딩 청소 일을 하는 것은 세상의 편견..

읽고본느낌 2020.01.08

열심히 안 살아 다행이다

아흔이 가까워지면서 어머니는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말을 자주 하신다. 죽을 둥 살 둥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았더니 다 헛것이었다. 너희들은 나같이 바보로 살지 마라. 좋은 데 돌아다니고, 맛있는 것 먹고, 건강을 챙겨라. 늙고 아프면 모든 게 쓸데없다. 인생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식으로서는 마음이 아프다. 잘 못 해 드리는 게 있지 않나 싶어서다. 어머니는 그래도 둘째네와 살고 있지만, 고향의 다른 노인은 독거로 지내시는 분이 많다. 자식이 많지만 전부 외지에 나가 있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외로워서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병과 외로움은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에 부딪히는 실존의 문제다. 따져보면 인생은 어차피 혼자이고, 생로병사는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나만 특별할 수가 없다...

참살이의꿈 2019.04.09

일은 언제까지 필요할까

퇴직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손을 놓게 되었을 때 대부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을 버거워한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주어진 일을 해야 편안하게 느끼는 게 습관이 되었다. 설사 일을 구하지 않더라도 규칙적인 일과를 가져야 제대로 사는 거라고 착각을 한다. 일없이 빈둥거린다는 건 뭔가 모자라는 것이라고 여긴다. 정시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게 체질화가 되었다. 그런 사람에게 퇴직 후 자유 시간이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인 것이다. 그래서 바쁘게 자신을 몰아붙인다. 취미 활동도 거의 전투 수준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거다. 이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생기는 슬픈 자화상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저 성..

참살이의꿈 2015.04.15

반가운 소식

그저께 동아일보에 반가운 소식이 실렸다. 기사를 옮기면 이렇다. "SK그룹의 에너지기업 SK이노베이션은 1일부터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주지 않는다. 전 사원을 대상으로 지난달부터 '오후 6시 반 의무퇴근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면 '퇴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30분 뒤에는 PC가 자동 종료된다. 지난 한 달간 직원 만족도는 90% 이상으로 나타났다. LG전자도 세탁기 냉장고 등을 만드는 홈어플라이언스(HA)사업본부가 시작한 '수요일 오후 5시 퇴근제'를 최근 다른 사업부로 확대했다. HA사업본부는 조성진 사장의 지시에 따라 2월부터 매주 수요일 전원이 오후 5시에 강제 퇴근해왔다. 6개월이 지난 현재 서울 여의도 본사와 경남 창원공장의 수요일 5시 정시 퇴근율은 97%에 이른다. 지..

길위의단상 2013.08.07

사람은 왜 일을 하는가?

"다 먹고 살기 위해서지." "돈만 있으면 일 안 하고 놀 텐데." 농담하듯 흔히 내뱉는 이런 말들이 빈말이라는 건 퇴직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아무래도 현역에서 떠난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의 고민이 마땅한 일거리에 관한 것이다. 먹고 사는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여전히 일을 찾는다. 여기서 일이란 어딘가에 소속되고 규칙적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사람들은 일을 안 할까? 그래도 대부분은 규칙적인 일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역시 여유가 생긴다면 일없는 공허를 견디지 못 할 것이다. 평소에 열심히 일 한 사람들이 일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는 더 어렵다. 노는..

참살이의꿈 2013.04.22

미친 나라

어느 중견 회사에 다니는 조카로부터 회사 얘기를 가끔 듣는다. 조카를 보면 우리나라의 회사원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실감한다. 거의 매일 야근이어서 밤 10시 전에 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고, 심지어는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휴일에도 출근한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살인적인 근무 환경이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닌다고 본인도 말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회사 동료들도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있지만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랬다가는 언제 잘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듣는 범위에서 이 회사 사원들은 거의 현대판 노예에 가깝다. 법에 규정된 근로 조건도 지키지 않는 것 같다. 특수한 몇몇 회사를 제외하곤 우리나라 대부분의 근무 여건이 비슷할 것이..

참살이의꿈 2012.12.18

퇴직하고 나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십중팔구 이런 질문을 받는다. "무슨 일 하며 지내?" 어떤 사람은 맨 첫 마디에 묻기도 하는데, 대개는 이런 질문이 나오는데 늦어도 30초가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이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이렇게 물어 나를 놀라게 했다. "요사이는 무슨 책을 읽고 있어?" 사람들은 일을 거의 자신과 동일시한다. 일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하는 일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문제는 일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저 일 속에 파묻혀 산다. 그런 사람에게 일은 진정한 삶으로부터의 도피밖에 되지 않는다. 퇴직 후의 취미생활도 마치 일하듯 전투적으로 한다. 그들은 고독한 시간이 두려운 것이다. 내면의 불안이 더욱 일로 내모..

참살이의꿈 2011.12.22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쉬는 나라

얼마 전에 OECD 가입국의 연평균 노동시간 통계를 보았다. OECD 평균은 1,768시간인데 우리나라는 2,316시간으로 1등을 차지했다. 주요국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1,392 시간 노르웨이 1,417 시간 독 일 1,433 시간 프 랑 스 1,533 시간 일 본 1,785 시간 미 국 1,794 시간 헝 가 리 1,966 시간 한 국 2,316 시간 한국은 OECD 평균보다 1년에 무려 528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68.5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가장 적게 일하는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거의 1,000시간 가까이 더 일한다. 매일 3시간 정도씩 더 일한다는 얘기다. 이는 하루 평균 수면시간으로도 나타난다. 이 역시 한국의 수면시간이 가장 짧다...

참살이의꿈 2011.12.12

뭘 하고 지내나요

은퇴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이것이었다. “퇴직하면 무슨 일을 할 계획인가요?”은퇴 후에도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대동소이하다. “뭘 하고 지내나요?” 아무 일 하지 않으려고 일찍 퇴직을 했는데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대략 난감이다. 사람들은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못 미더워한다. 그래, 지금은 큰 소리 치지만 좀더 지내봐라, 남는 시간 못 견딜 걸, 대체로 그런 눈치다. 가끔은 산에 다니고 꽃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건 일이 아니라 취미라고 한다. 매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 뭔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일을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또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분히 여유가 되는 사람도 관성에 의해 일에 매달리는 경우를 본다. 사람들..

참살이의꿈 2011.04.03

이건 노동이 아니라 운동이야

아침 출근길이었다. 땀을 흘리며 무거운 신문뭉치를 나르던 한 청년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건 노동이 아니라 운동이야!”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자기암시를 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지 청년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겨운 노동이 되기도 하고, 즐거운 운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청년의 말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이라도 직업이 되면 대개 고되고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대 조직의 특성상 일에서 보람을 찾거나 즐기는..

길위의단상 2006.07.13

독거(獨居) / 이원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독거(獨居) / 이원규 나는 자본이 돌리..

시읽는기쁨 2006.04.25

일의 의미

조기 퇴직을 하고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십중팔구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내려가서는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낼 계획인가요?” 그러나 아직껏 묻는 사람이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할 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냥 텃밭이나 가꾸며 지내겠다는 말로는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직업으로서의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 치여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누구나 일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집착은 그 이상으로 강해 보입니다. 꼭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삶 자체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

참살이의꿈 2005.08.06

배수로 작업

터의 뒤쪽에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성가시게 한다. 시멘트블록 50개를 사다가 한 줄로 쌓았다. 시멘트블록을 나르랴, 줄 맞추어 쌓으랴, 안 그래도 서툰 노동인데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줄도 삐툴삐툴, 높낮이도 들쭉날쭉, 다른 사람이 본다면 허허 하며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사람을 사서 할려니 요사이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내 땀의 흔적을 보게 되는 보람일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땀이 정신적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 육체적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복잡한 세상사는 잊어버리게 된다. 내 일을 하면서 명상의 효과까지 덤으로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러..

참살이의꿈 2004.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