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조 5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나이 예순으로 맞는 새해는 무겁다. 하얀 백..

시읽는기쁨 2012.01.01

오이도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합니다." '오이도'로 가는 전철을 4년 동안 타고 출퇴근했지만 정작 오이도에는 가보지 못했다. 어떤 장소는 차라리찾지 않아마음속에만 담아두는 게 나을 때가 있다. 오이도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때는 임영조 시인의 '오이도'라는 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마음속 성지는 변방에 있다 오늘같이 싸락눈 내리는 날은 싸락싸락 걸어서 유배 가고 싶은 곳 외투 깃 세우고 주머니에 손 넣고 건달처럼 어슬렁 잠입하고 싶은 곳 이미 낡아 색 바랜 시집 같은 섬 -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 섬에 가본 적 없다 이마에 '오이도'라고 쓴 전철을 날마다 도중에 타고 내릴 뿐이다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둔 여자 같은 오이도 문득 가보고 싶다, 그 섬에 가면..

사진속일상 2011.11.08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읽는기쁨 2009.04.09

孤島를 위하여 /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

시읽는기쁨 2007.03.20

성가족 / 임영조

어디서 쫓겨온 일가족일까 아파트 단지 높다란 굴뚝 꼭대기 피뢰침 바로 아래 짓다버린 까치집 언제부턴가 올망졸망 새끼들 딸린 가난한 까치부부가 세들어 산다 비바람치고 천둥소리 거친 날이면 보채는 새끼들을 품고 잠든 부부는 스스로 집이 된다 요람이 된다 남루도 때때로 행복이 되는 하늘 가장 가까운 성가족(聖家族)이 산다 - 성가족 / 임영조 '남루도 때때로 행복이 되는' - 이 구절을 읽으면 가슴이 찡해진다. 요즈음 같은 풍요의 시대에,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시대에, '남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게 된다. 대림 3주일이다. 가장 낮은, 가장 남루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다시 서울 시청 앞에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휘황찬란하게 번쩍이고,세종..

시읽는기쁨 200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