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869

비닐하우스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오래 한숨을 쉬었던 영화다. 내용이 스릴러 영화로 분류될 정도로 긴장을 시키지만, 나는 영화에서 비중 있게 나오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삶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문정은 아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소년원에 있는 아들은 곧 출소할 예정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문정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학 증세가 나오는데 이는 문정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정은 성심성의껏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간병하는데, 어느 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문정은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든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만다. 가족이라는 족쇄가 문정..

읽고본느낌 2023.12.01

다읽(21) - 걸리버 여행기

'다시 읽기'가 아니라 '제대로 읽기'였다. 이때껏 기이한 여행담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은 당대의 정치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었다. 소인국이나 거인국이라는 소설의 소재도 왜곡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쓴 는 4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소인국인 릴리펏 여행기, 2부는 거인국인 브롭딩낵 여행기, 3부는 라퓨타, 바니발비, 그립덥드립, 럭낵, 일본 여행기, 4부는 휘넘국 여행기다. 주목할 점은 여행의 후반부로 갈수록 걸리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넓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어떤지가 드러난다. 작가는 재미보다는 교훈을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읽고본느낌 2023.11.23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걷기가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유,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현존, 평안 등 책의 차례에 등장하는 용어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걷기의 대표 주자라고 할 만한 여러 인물들(니체, 랭보, 루소, 소로, 네르발, 칸트, 프루스트, 벤야민, 간디, 횔덜린)도 소개한다. 이들은 걸으면서 사유하고 자기 세계를 완성해 나간 사람들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걷기는 소요나 산책에 가깝다.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라는 별명이 붙은 루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하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서다. ..

읽고본느낌 2023.11.16

동주

구효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윤동주 시인이 직접적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겐타로와 요코라는 제삼자를 통해 윤동주를 그린 소설이었다. 윤동주, 겐타로, 요코 셋은 두 세계 사이에 불안하게 서 있는 경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겐타로는 1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니며 윤동주의 유고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요코라는 인물을 기록으로 마주하게 된다. 요코는 아이누인이었지만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하다가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여자다. 윤동주가 동경에서 하숙을 할 때 요코는 하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윤동주를 가까이서 보았다. 요코의 추억을 톻해 윤동주가 어떤 인물인지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읽고본느낌 2023.11.13

낮의 목욕탕과 술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떠 있을 때의 목욕과 술에 대한 예찬이다. 이런 소재로 재미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에서 즐길거리는 사방에 널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은이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본의 만화가로 도쿄와 근교의 오래된 목욕탕을 순례하는 복고풍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목욕 후 마시는 낮술의 달콤함도 빠질 수 없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 최고×최고, 그게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암, 그렇고말고. 이히히히...

읽고본느낌 2023.11.07

그늘에 대하여

일본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산문집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전통미에 경도해 이를 글로 아름답게 살려내는 새로운 경지를 연 작가다. 여기에 실린 '그늘에 대하여'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그늘에 대하여'를 비롯해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흔히 전통미를 말할 때 형태와 맵시에 주목하지만 작가는 일본 건축에 스민 그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늘에 대하여'는 빛을 다루는 일본인의 섬세함을 일본적 감성으로 잘 그려내 보여준다.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이다. '음예(陰翳)'는 생소한 용어인데 '그늘인 듯한데 그늘이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

읽고본느낌 2023.11.05

나를 살리는 글쓰기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문장 노동자, 독서광 - 이 책의 저자인 장석주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작가는 40년 동안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낼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다. 작가는 말한다. "글쓰기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는 글쓰기에 임하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행위다. 전업작가의 글쓰기는 종교인의 처절한 수행과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발견이면서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글쓰기의 엄중함과 치열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서관에 묻혀 살며 읽고 글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이 '..

읽고본느낌 2023.10.23

다읽(20) - 로빈슨 크루소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까마득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 생활을 할 때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에 부지런히 다닐 때인 20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역본을 다시 읽어보니 같은 책이지만 새롭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디포가 를 영국에서 출간한 해는 1719년이다. 당시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식민지의 자원을 약탈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크루소의 사고방식도 철저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크루소의 사고나 행위를 보면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기독교 사상이 결합하여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인다. 크루소는 치밀하면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도전하는 근대인의 모습 그대로다. 크루소는 노예로 쓸..

읽고본느낌 2023.10.19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작가의 글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늦가을 저녁의 분위기가 진하다. 쓸쓸하지만 석양의 기운이 따스하다. 이 계절에 읽기에 적당하다. 작가의 산문집인 에는 그런 느낌의 글이 가득하다. 음미하며 조금씩 읽었다. 책에 실린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요일의 문장'에 연재한 것이다. 책 표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와 정원 그리고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며 햇빛과 의자를, 대숲과 바람을, 고전과 음악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한다." 작가의 글에는 안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작가는 안성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추알처럼 잘 익어가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부서뜨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

읽고본느낌 2023.10.13

시인

은 이문열 작가가 김삿갓의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가정사를 안다면 김삿갓을 빌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然, 1807~1863))으로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 항복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나이 6세 때였다. 죄인의 집안 자식이라는 올가미를 쓴 채 숨어 살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는 즉흥시를 남겼다. 초기에는 신분 상승의 꿈을 가졌으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체제의 일탈자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이문열 작가의 부친은 서울농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6.25가 터지자 월북했다. 그런 연유로 전쟁 뒤 ..

읽고본느낌 2023.10.11

서울대 10개 만들기

"한국은 교육지옥이다." 이런 명제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고등학교를 전쟁터라고 생각하는 학생 비율이 우리나라는 80%에 달하는데, 중국은 41%, 미국은 40%, 일본은 13%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럽 학교와의 비교는 아예 되지 않는다. 한국만큼 사교육이 번창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 없다. 한국 교육은 '시민'이 아니라 '전사'를 기른다. 그렇다면 "왜 한국만 교육지옥인가?"라는 물음이 따른다. 사회학자인 김종영 선생이 쓴 는 여기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선생은 이런 교육지옥의 원인이 대학 서열 체제로 인한 병목 현상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서울대를 필두로 한 SKY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인다. 여기에는 정부관료와 사교육 세력,..

읽고본느낌 2023.10.03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당신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닐봉지를 줄이려고 에코백을 샀는가? 페트병에 담긴 음료를 구입하지 않기 위해 텀블러를 갖고 다닐까?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입했을까? 단언한다. 당신의 그런 선의만으로는 무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유해하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온난화 대책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믿는 당신이 진정 필요한 더 대담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에코백과 텀블러 등을 구입하는 소비 행동은 양심의 가책을 벗게 해주며 현실의 위기에서 눈을 돌리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있다. 그런 소비 행동은 그린 워시(green wash), 즉 자본이 실제로는 환경에 유해한 행동을 하면서도 환경을 위하는 척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에 너무도 간단히 이용되고 만다." 의..

읽고본느낌 2023.09.26

소공녀

본 지 꽤 되었지만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다.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는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지켜나가는 젊은이다. 일당 45,000원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욕심 없이 살아간다. 또래 젊은이들이 꿈꾸는 돈이나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미소의 소확행이라면 일이 끝난 뒤의 위스키 한 잔, 담배, 그리고 미소만큼 착한 남자 친구다. 어느 날 거처하고 있던 단칸방의 오른 월세를 부담할 수 없어 미소는 홈리스가 된다. 미소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싸들고 나서며 길 위의 여행자로 살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밴드 활동을 함께 하던 멤버들을 찾아간다. 영화는 옛 멤버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미소와의 교감이나 갈등을 다룬다. 집도 없으면서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미소를 보며 염..

읽고본느낌 2023.09.23

인간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은 이렇게 시작한다.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공감되는 바가 더 있었을까, 사실 지금 나 같은 나에는 감정 이입이 쉽게 되지는 않는다. 전후 일본의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려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지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인 요조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태생이 인간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사회공포증이다. 이들은 사람의 심리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대인 접촉을 기피한다. 많은 경우 격리된 삶을 살지만 요조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면서 도리어 적극적으로 '익살'을 부리며 인기를 얻으려 한다. 이런 이중적인 자기모순이 결국 절망에 빠져들며 방황하게 된다. 1940년대 후반의..

읽고본느낌 2023.09.2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선생이 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신문 칼럼이 다루는 다양한 소재의 글감을 일상, 학교, 사회, 영화, 대화의 5부로 나누어 실었다. 선생의 세상을 보는 시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한 글맛을 느낄 수 있다. 5년 전 이맘때 경향신문에 실렸던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은 세간의 화제를 끌었던 모양이다. 선생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추석에 만나는 친척들에게도 원용해보라고 충고한다.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

읽고본느낌 2023.09.16

다읽(19) - 싯다르타

대학생 때 한 친구는 좋아하는 여학생과 가까이하고 싶어 불교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여학생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친구는 여학생한테서 수시로 불교 관련 서적을 빌려왔다. 나도 따라서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친구보다 내가 더 열심이게 되었다. 이 도 그때 읽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당시 상황과 관계없는 나중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헤세는 인간의 문제, 그중에서도 인간 성장과 완성의 길을 다루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동양 사상도 짙게 배어 있다. 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헤세의 특징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바라문 계급의 싯다르타는 요사이 말로 하면 금수저로 태어났다. 더구나 잘 생기고 총명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제도 종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는 없었다. 고뇌하던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

읽고본느낌 2023.09.09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의 허무에 대한 김영민 선생의 산문집이다.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많은 문학, 철학, 예술 작품을 소개된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줄기찬 노력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닿는다. 지은이의 진단을 보자. "현실은 복잡성과 딜레마와 역설로 가득하다. 외로워서 결혼을 했더니 더 외로워지는 역설. 배가 나와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역설. 포기했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되더라는 역설. 미래를 예측한다며 약을 파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삶이 정녕 법칙과 예측대로 흘려가던가. 모르겠다. 대체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빔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지 않던가. 그러다가..

읽고본느낌 2023.09.02

더 웨일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어버린 찰리라는 남자가 있다. 강박적인 폭식으로 27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이 되어 보조 기구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 웨일[The Whale]'은 자학 끝에 죽음을 맞는 - 동시에 세상과 화해하려고 하는 - 찰리의 마지막 며칠을 담고 있는 영화다. 찰리의 인생은 기구하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두었지만 동성 제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렸다. 파트너마저 세상을 떠나자 찰리의 삶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폭식증에 걸려 지금의 몸이 된 채 망가졌다. 다행히 글쓰기 시간강사로 인터넷 강의를 하며 생계는 유지한다. 찰리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마지막으로 딸과 화해하려 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단출하다. 찰리 외에 딸 엘리, 간호사 리즈, 전도사 토마스 정도다. 그러나..

읽고본느낌 2023.08.26

인류의 여정

인류의 여정이라고 하면 대략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해서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간 뒤 현재의 문명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이 거대한 여정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책 은 오데드 갤로어(Oded Galor)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류의 여정을 풀이한다. 다루는 주요 주제는 부와 불평등의 기원이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급격한 전기를 맞았다. 지은이는 산업혁명을 인류의 여정의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본다. 지은이가 그래프로 보여주는 건강이나 부, 교육 면에서의 변화는 이 시기에 와서 너무나 폭발적이다. 마치 빅뱅이 일어난 것 같다. 그전까지 인류의 삶은 질적인 면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대동소이했다. 기술 혁신이 있었더라도 생활수준이 향상되..

읽고본느낌 2023.08.22

공산토월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문구 작가의 대표 중단편을 모은 책이다. 연작소설인 '관촌수필'에서 네 편, '우리동네'에서 두 편, '유자소전' 등 기타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관촌수필(冠村隨筆)'은 두 번째 읽어보는데 마음 밑바닥을 흔드는 감동은 처음과 같았다. 작가의 자전소설인만큼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그 시절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했다. 이 책에는 네 편이 담겨있는데 '일락서산(日落西山)'에는 작가의 할아버지, '행운유수(行雲流水)'에는 옹점이, '녹수청산(綠水靑山)'에는 대복이, '공산토월(空山吐月)'에는 신석공이 나온다. 다시 읽어봐도 제일 끌리는 인물은 역시 '행운유수'의 옹점이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옹점이를 만났다. 작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열 살 위의 소녀 옹점이는 ..

읽고본느낌 2023.08.17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프레임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진영이 여론을 이끌어 나간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외친들 도리어 코끼리를 생각나게 해 줄 뿐이다. 반대하는 순간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되어 있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가 쓴 이후 '프레임'이란 말은 유행어처럼 번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는 미국에서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고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면서 민주당이 참패한 때였다. 진보 진영이 왜 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은 '프레임'이라는 핵심 단어로 풀고 있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과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

읽고본느낌 2023.08.12

삼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근자에는 국어 선생을 했던 후배가 추천하기도 해서 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쳤지만 자기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두꺼우면서 낯선 용어가 자주 나와 읽기에 부담이 될 거라고 주의도 줬다. 마침 출판사 지만지에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를 펴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는 염상섭 작가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이다. 215회까지 이어졌다니 보통의 연재소설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분량이다. 현재의 책으로도 1천 페이지가 넘는다. 이 작품이 문학사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나로서는 특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1920년대의 경성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보는 재미는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1..

읽고본느낌 2023.08.05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13년 전인 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 교정에 대자보가 하나 붙었다. 제목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로 경영학과 3학년생이던 김예슬이 쓴 것이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 대학생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거부 선언이 찬반 논란을 불러왔고, 숨 죽이고 있던 목소리가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블로그에 대자보 전문을 옮겼고 공감을 표하며 응원을 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없었다. 호수에 생긴 파문은 이내 가라앉아 보였다.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는 강고한 시스템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김예슬 씨가 선언을 하게 된 배경과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소책자인데 선언을 한 그해에 ..

읽고본느낌 2023.07.30

다음 소희

소희는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2학기가 되어 어느 통신회사 콜센터에 현장 실습을 나간다. 어린 학생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근무 환경이 꿈 많은 소녀를 절망하게 만든다. 회사는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면서 서로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발버둥을 쳐서 좋은 실적을 올리지만 그나마 실습 학생에게는 보상을 해 주지 않아 마찰이 생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 소희는 결국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다음 소희'는 6년 전에 전주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의 현장 실습은 여러 차례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안타까운 죽음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곤 한다.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현장 실습 나간 학생으로부터 작업 환경이 ..

읽고본느낌 2023.07.24

다읽(18) - 데미안

20대 때 읽은 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 늘 궁금하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는데 아쉽게도 그때의 느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책을 읽으며 확인했다. 50년 전이니 기억한다는 게 도리어 이상할지 모른다. 하물며 데미안이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싱클레어이고 데미안은 그의 멘토며 구원자다. 또는 싱클레어 내면에 있는 영혼의 목소리로 볼 수도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맞다. 은 자아를 깨뜨리고 새로운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소년의 구도기라 할 수 있다. 독립된 인간으로 서려는 청춘의 성장통..

읽고본느낌 2023.07.22

노화의 종말

"노화는 질병이다"라고 이 책의 지은이는 단언한다. 질병이므로 치료할 수 있다. 노화를 막을 수 있다면 죽음도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더 이상 인간의 숙명이 될 수 없다. 이 책 은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이자 노화와 장수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D. A. Sinclair) 박사가 썼다. 지은이는 현재 과학자들이 찾아낸 노화 현상의 연구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지은이가 정의하는 노화란 세포의 상해와 손상에 대응하는 후성유전 신호 전달자들이 과로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생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생명체가 극한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착한 '생존 회로'가 노화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생존 회로는 DNA가 끊겼음을 알아차렸을 때 세포 분열과 번식을..

읽고본느낌 2023.07.17

킹 오브 클론

황우석 박사의 근황이 나와서 관심을 가지고 본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다. 황 박사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중 한 순간에 급전직하하여 과학계에서 퇴출되고 잊히게 된 인물이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그는 한때 '생명 복제의 왕'이었다. '킹 오브 클론(King of Clones)'에는 황 박사가 직접 나와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는 지금 아랍에미레이트에 있는 '바이오테크 연구센터'에서 동물 복제를 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화면에는 주로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의뢰한 반려견 등의 동물을 복제해 주는 것으로 나온다. 아랍에미레이트 정부의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황우석 박사의 등장과 몰락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클로닝 기술을 통해 여러 동물을 복제하고 인간의 체세포까지 복제에 성공하자 전세계..

읽고본느낌 2023.07.11

더 브레인

몇 달 전에 읽은 의 여운이 남아 있다.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설명에 끌린다. 심리학자의 분석과는 방법이 다르지만 만나는 지점은 같을 것이다. 아직 뇌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초보 수준이다. 외부 세계의 질서나 작동 원리의 지식에 비해 정작 자신 안에 들어있는 - 어쩌면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 1.4kg의 두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이 책 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신경과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이글먼이 썼다. 같은 제목의 TV 프로그램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한다. 뇌과학의 입문서로 좋다고 해서 읽어 보았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한 친절한 설명과 사례가 돋보였다. 내용은 과 공통되는 부분이 많았다. 에서도 인간 뇌의 특징으로 가소성(..

읽고본느낌 2023.07.08

산업사회와 그 미래

지난달에 '유나바머(UNABOMBER)'가 미국 교도소에서 81세로 사망했다. 그의 본명은 테어도르 카진스키(T. J. Kaczynski)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우편물 폭탄 테러로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오래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보도가 되며 화제가 되었던 사건으로 기억이 난다. 유나버머[UNABOMBER = University + Airline + Bomber]란 그가 주로 대학과 항공사에 소포로 포장된 폭탄을 보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열여섯 차례에 걸친 폭탄 테로로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유나바머는 IQ 167의 천재였다. 16세에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서 수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교수가 되었다. 어떤 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20대 후반에 그는 갑자기 교..

읽고본느낌 2023.07.01

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선생이 쓴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다. 전기라기보다는 충무공이 치른 해상 전투를 중심으로 장군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국뽕기가 있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사실(史實)에 입각한 드라이한 설명이 좋았다. 또한 각 전투마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조선 해군의 힘이었다. 천자총통 등의 함포로 무장한 판옥선은 일본 해군보다 뛰어났다. 충무공은 우리 해군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충무공의 기본 전술은 일본의 조총 사거리 밖 먼 거리에서 포로 일본 함선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지형이나 때를 이용한 충무공의 전술이 더해져서 23전 23승의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이 완전히 다른 ..

읽고본느낌 2023.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