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시민의 불복종

샌. 2009. 7. 8. 13:51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46년 7월에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을 반대하면서 세금 납부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들어간다. 세급 납부를 거부한 이유는 자신이 낸 돈이 노예를 사는데 쓰이거나, 사람을 죽이는 총을 만드는데 쓰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친척이 세금을 대납해서 그는 하루 만에 풀려났지만 이 일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 사건에 관계된 그의 강연 내용을 후에 책으로 출판한 것이 유명한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다. '시민의 불복종'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톨스토이나 간디에 영향을 미치면서 정권의 폭력에 대한 저항 정신의 원류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소로우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는 현 정권의 폭력이 도를 지나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아예 리영희 선생은 파쇼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아직 해결 되지 못한 용산 참사로부터서명교사 대량 징계 협박까지 폭력정부의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반민주적인 작태는 4대강 살리기를 한다면서 생태파괴형 토건국가로 나라를 몰아가고 있다. 이렇게 환경이나 약한 자에 무자비하면서 민의를 거슬러도 뻔뻔하고 고집 센 정권은 처음 본다.

 

소로우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했다. 또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해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면서 자신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 글을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입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여겨진다. 아래에 '시민의 불복종'을 옮겨 보았다.

 

그리고 소로우가 감옥에 있을 때의 일화 한 토막. 소로우가 감옥에 있다는 전갈을 듣고 에머슨이 찾아가 물었다. "자네가 왜 이런 감옥에 있는가?" 소로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왜 감옥 밖에 있습니까?"

 

시민의 불복종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이다.”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 빨리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말을 실천에 옮기면 결국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이다.”라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데, 사람들이 준비가 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다. 정부는 기껏해야 하나의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늘, 그리고 모든 경우에는 때때로 정부는 불편한 존재이다.


상비군을 두는 데 대해 비중 있고 설득력 있는 반대 의견이 많이 제기되어 왔는데, 이런 의견은 결국 상설 정부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상비군은 상설 정부의 한쪽 팔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국민이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지만, 국민이 그것을 통해 행동을 하기도 전에 정부 자체가 남용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멕시코전쟁을 보라.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상설 정부를 자신들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 국민들은 애초에 이런 처사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미국 정부라는 것은 아무 손상 없이 후대에 물려주려 애를 쓰지만 매 순간마다 그 순수성을 잃어가는 하나의 전통, 그것도 최근에 생겨난 전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에게는 살아있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생명력과 힘도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뜻대로 정부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 자신에게는 나무로 만든 총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복잡한 기관을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 하고, 또 그 기관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는지를, 심지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좋다고 치다. 허나 이 정부라는 것은 스스로 어떤 사업을 진척시킨 일이 없다. 다만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재빨리 비켜준 적이 있을 뿐이다. 정부는 이 나라의 자유를 수호하지 못한다. 정부는 서부를 개척하지 못한다. 정부는 사람들을 교육하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을 이룩한 것은 미국 국민이 타고난 어떤 기질이며, 만약 정부가 이따금 방해만 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일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라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도록 기꺼이 돕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정부가 가장 소용이 있을 때는 곧 피치자들이 간섭을 가장 적게 받을 때이다. 무역과 상업이 인도산 고무처럼 탄력적이지 않았더라면, 입법자들이 끊임없이 놓아두는 장애물들을 결코 가뿐하게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입법자들의 의도를 부분적으로 참작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들의 실제 행동이 낳은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입법자들은 철로에 이상한 물건을 올려놓는 악의적인 사람들과 똑같이 처벌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지금 당장 정부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 당장 더 나은 정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가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이지 밝혀야 하며, 이는 그러한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아무튼 권력이 일단 국민의 손에 들어왔을 때 다수의 지배가 허용되고 오랜 기간 계속되는 실제적인 이유는 다수가 옳을 가능성이 크거나 소수에게 가장 공정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물리적으로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다수가 지배하는 정부는 정의에 토대를 둘 수는 없는 바, 사람들이 이해하는 한에서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가 아니라 양심이 옳고 그름을 실제로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다수는 단지 편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시민이 한 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에게 양심은 왜 있는 것인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느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을 우리는 충분히 들어왔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정의롭게 만든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조차도 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법에 대한 부당한 존경심 때문에 흔히 빚어지는 일반적인 결과는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대령, 대위, 하사, 이등병, 탄약운반 소년병 등은 경탄할 만한 대열을 이루며 언덕과 골짜기를 넘어 전장으로 행군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의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행군은 무척 힘들고 또한 심장은 고동을 치는 것이다. 군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저주받을 짓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존재인가? 도대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어떤 사악한 자가 부리는 움직이는 작은 요새나 탄약고인가?


오늘날 이 미국 정부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바람직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한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이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조직을 단 한 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심각하고 참을 수 없을 때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권리 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말한다. 반면 1775년의 혁명(미국 독립전쟁)은 그런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가 이 정부가 외국에서 들여오는 어떤 상품에 세금을 매겼으므로 나쁜 정부라고 내게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정부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물건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계에는 마찰이 있게 마련이며, 어쩌면 이 마찰은 자신의 악을 상쇄할 만큼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마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하지만 마찰이 기계 자체를 삼켜버리고 억압과 강탈이 조직화될 때, 나는 이런 기계를 내팽개쳐 버리자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자유의 피난처를 자임하던 한 나라의 국민 6분의 1이 노예이고, 또 나라 전체가 외국 군대에 의해 부당하게 짓밟히고 정복되어 군법의 지배를 받을 때,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때든 이에 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더라도 전혀 성급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의무가 더욱 시급한 까닭은 우리나라가 짓밟힌 나라가 아니라 침략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일리는 편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는 경우, 즉 한 개인이든 국민이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들을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만약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의 널빤지를 부당하게 빼앗았다면, 나는 설령 내가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페일리의 말대로 한다면 이것은 불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널빤지를 돌려주지 않을 경우 물에 빠져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이 나라 국민의 노예 소유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하여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여러 나라들이 실제로는 페일리의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에서 매사추세츠 주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국가라는 창녀, 은실로 짠 옷을 걸친 암캐가 치맛자락은 걷어 올렸다만, 그 영혼은 진흙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매사추세츠 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남부의 10만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10만 상인과 농부들이다. 이들은 인간애보다는 상업과 농사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대가가 어떻든 간에 노예들과 멕시코전쟁에 대해 정의를 실천할 마음가짐이 없다. 나는 아득히 멀리 있는 적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서 먼 곳에 있는 적과 협조하고 그들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는 자들과 싸우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멀리 있는 적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우리는 다수 대중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소수가 다수보다 실제로 더 현명하거나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보다는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가 되기 때문이다. 허다한 사람들이 노예제와 전쟁에 반대하는 소신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로 노예제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워싱턴과 프랭클린의 자손임을 자처하면서도 두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앉아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유의 문제를 자유무역의 문제 뒷전으로 밀어버린 채, 저녁을 먹고 나서 조용히 물가시세표와 최근 멕시코전쟁 소식을 나란히 읽다가는 필시 거기에 머리를 처박고 잠에 빠지는 것이다.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니, 장기나 주사위 놀이와 다른 점이라면 다만 거기에 약간 도덕적 색채가 있어서, 옳으냐 그르냐 하는 도덕의 문제를 갖고 노름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내기가 끼어든다. 그러나 투표자의 인격을 거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목숨을 걸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꺼이 그 문제를 다수결에 맡긴다. 따라서 그 책임은 결코 편의의 책임 정도를 넘지 않는다. 옳은 쪽에 투표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내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힘을 통해 승리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대중의 행동에는 덕이란 게 거의 없다. 마침내 다수가 노예제의 폐지에 표를 던지게 될 때는 노예제에 대한 관심이 시들었기 때문이거나 투표를 통해 폐지할 만한 노예제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에는 대중이 남아 있는 유일한 노예일 것이다. 자신의 표를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만이 그 표를 통해 노예제의 폐지를 앞당길 수 있다.


어떤 악, 심지어 가장 극심한 악일지라도 악을 뿌리뽑는 데 자신을 바치는 것이 한 사람의 당연한 의무는 아니다. 사람은 그 밖에도 다른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악에서 손을 떼고, 설령 악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제로 악을 뒷받침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다.


내가 다른 일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그의 어깨 위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커다란 모순이 용납되고 있는지 보자. 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정부가 나보고 노예반란을 진압하라거나 군인이 되어 멕시코로 가라고 명령하는걸 들었으면 좋겠어. 내가 갈지 안 갈지 두고 보자고.”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직접적으로는 충성심으로, 간접적으로는 최소한 자신들이 내는 돈으로 대리병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군인이, 바로 그 전쟁을 벌이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를 계속해서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이 군인은 전쟁을 거부함으로써 이 사람들의 행동과 권위를 무시하고 경멸했는데도 바로 그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다. 마치 국가가 잠시라도 죄짓는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사람 하나를 사서 채찍질을 하는 정도로 회개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질서와 시민정부라는 이름 아래 마침내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비열함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지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죄가 부끄러워 얼굴을 한번 붉히지만 이내 무관심해진다. 그리고 부도덕은 곧 무도덕이 되는데, 그것도 우리 삶에 썩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정의를 알고 실천하는 것은 사물과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런 행동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행동은 국가와 교회를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갈라놓는다. 아니, 개인까지도 그 안에 있는 신성(神性)으로 부터 악마를 갈라놓는다.


정의롭지 못한 법이 존재한다고 하자. 그 법을 준수하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에라도 그 법을 위반할 것인가? 사람들은 보통, 지금과 같은 정부 아래서는 법률을 바꾸도록 다수를 설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저항한다면 치료약이 병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약이 병보다 더 나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정부가 치료약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왜 정부는 좀더 앞을 내다보고 개혁을 준비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현명한 소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왜 정부는 상처도 입기 전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뿌리치는가? 왜 정부는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시민들을 독려하여 잘못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항상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로 단정하는가?


악을 치료하기 위해 주 정부가 마련한 방법을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방법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며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일생이 다할 것이다. 내게는 다른 할 일들이 있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며 그 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주지사나 주 의회에 탄원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님은 내게 탄원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설령 내가 탄원을 하더라도 주지사나 주 의회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주 정부가 마련해 놓은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주의 헌법 자체가 악인 것이다. 이런 내 말이 가혹하고 고집스럽고 비타협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헌법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도한 누릴 자격이 있는 최고의 정신을 지극한 호의와 존경심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무릇 육신을 격동시키는 탄생과 죽음처럼 더 나은 것을 위한 변화는 으레 이러한 것이다.


나는 서슴없이 말하나니, 노예제 폐지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매사추세츠 주 정부를 지지하는 일을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하며,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자신들을 통해 정의가 승리하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이 이 사람들의 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아울러,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이웃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나로서 다수(Majority Of One)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이곳 매사추세츠 주에서 천 명, 아니 백 명,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명이,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를 그만두고 실제로 공범자의 입장에서 물러나 그 때문에 군(郡)감옥에 갇힌다면, 그것이야말로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는 것이다. 시작이 얼마나 작아 보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일단 한번 제대로 행해지면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부당하게 감옥에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곳은 역시 감옥뿐이다. 의기소침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매사추세츠 주가 마련해놓은 유일한 자리, 오늘날 가장 떳떳한 자리는 감옥이다. 비록 주 정부가 법령에 의거하여 이들을 가두었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원칙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감옥에 몰아넣은 것이다. 도망노예나 가석방된 멕시코인 죄수, 자기 종족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를 호소하러 온 인디언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역시 감옥이다. 격리되어 있으나 더욱 자유롭고 명예로운 곳, 매사추세츠 주가 자기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명예롭게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집 역시 감옥이다. 감옥에 갇히면 영향력을 잃게 되고, 힘찬 목소리로 주 정부의 귀를 괴롭히지 못하며, 감옥의 담장 안에서는 정부의 적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진리가 오류보다 얼마나 더 강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불의를 직접 겪어본 사람이 불의에 맞설 때 얼마나 설득력 있게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가를 모르는 것이다.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종이쪽지 한 장이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다수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한 소수는 무력하다. 아니 소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다. 그러나 소수가 온 힘을 다해 가로막으면 그 힘은 불가항력이 된다. 정의로운 사람을 모두 감옥에 가두든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정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만약 올해 천 명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세금을 내서 정부가 폭력을 휘두르고 무고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만큼 폭력적이고 유혈적인 짓은 아닐 것이다. 평화적인 혁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실로 이것이야말로 평화적인 혁명의 뜻이다.


어떤 이가 실제로 그런 것처럼, 세금 징수원이나 다른 공무원이 내게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뭔가를 하고 싶다면, 우선 직책부터 내놓으시오.”라고. 국민이 충성을 거부하고 관리가 자기 자리를 포기할 때, 혁명은 완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경우도 생각해보라. 양심이 상처를 입을 때에도 일종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상처를 통해 한 사람의 참된 인간다움과 불멸성이 흘러나가, 결국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피를 흘린다. 나는 지금 이런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단언하건대, 돈이 많을수록 덕은 줄어든다. 돈이란 것이 사람과 그가 바라는 대상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위해 그것을 손에 넣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가지게 된 것도 분명 무슨 큰 덕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면 대답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로 유보된다. 한편 돈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유일한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돈을 가진 사람의 도덕적 기반은 발 밑부터 송두리째 허물어진다. 이른바 ‘수단’이 늘어날수록 삶의 여러 가지 기회는 줄어든다. 부자가 자신의 교양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가난했던 시절에 품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내 이웃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이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그리고 사회안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결국 요점은 이 사람들은 현존하는 정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정부에 불복종할 경우 자신들의 재산과 가족에 미칠 결과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내가 한 순간만이라도 정부의 보호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부가 세금고지서를 내밀 때 내가 그 권위를 부정한다면, 정부는 순식간에 나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써버리고 나와 내 자식들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이는 참기 힘든 일이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서 동시에 외적인 면에서 편안하게 살기란 불가능하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될 것이다. 또다시 빼앗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남의 땅을 빌리거나 무단으로 점유해야 할 것이며 농사도 조금만 지어 바로 먹어 치워야 할 것이다. 별 여유 없이 근근이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한 채로 자신만을 의지해야 하며 많은 일을 벌여놓아서도 안 된다. 설령 터키에 가서 산다 하더라도, 어느 모로 보나 터키 정부의 충실한 국민 노릇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게 산다면 수치스런 일이며,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남부의 어느 먼 항구에서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일이 생겨 매사추세츠 주가 보내주는 보호의 손길을 원하게 되거나, 내가 고향에서 평화적인 사업을 하며 오로지 재산 모으기에만 전념하게 되기 전에는, 나는 매사추세츠 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나의 재산과 생명에 대한 주 정부의 권위를 거부할 수 있다. 나로서는 이 정부에 순종하는 것 보다 불복종하여 처벌받는 쪽이 어느 모로 보나 잃는 것이 적다. 정부에 복종하는 경우 나는 내 가치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우월한 지능이나 정직이 아니라 우월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다수가 가진 힘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나보다 더 지고한 도덕률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내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나보고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다. 나는 다수 대중의 강요에 다라 이러저러한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도대체 어떤 삶이겠는가? 정부가 내게 “돈을 내놓던지 목숨을 내놓아라.”라고 말할 때, 왜 내가 황급히 정부에 돈을 내야 하는가? 정부로서는 큰 곤경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 스스로 도와야 한다. 내가 나 스스로 돕듯이 말이다. 짐짓 우는 소리를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사회라는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기술자의 아들이 아니다. 도토리 한 알과 밤 한 알이 동시에 떨어졌을 때 하나가 잘 자라도록 다른 하나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서로 각자의 법칙에 따라 능력껏 싹을 틔우고 자라서 무성해지다가 결국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려서 말라 죽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나무가 자신의 천성에 따라 살지 못하면 결국에 죽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곳(감옥)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노라니,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어느 머나먼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광장의 시계 종소리와 저녁 무렵 마을에서 나는 온갖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창살 안에 있는 창문을 열어 놓고 잤기 때문에 이 모든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마치 내 고향 마을을 중세의 시점에서 보는 것 같았으니, 우리의 콩코드 강은 어느새 라인 강으로 바뀌어 있었고 눈앞에는 성과 기사들이 어른거렸다.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의 주인공 역시 옛적 중세의 시민들이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감옥 바로 옆에 있는 마을 여관의 부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듣게 되었다. 나로서는 정말 새롭고 진기한 경험이었다. 고향 마을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듯했다. 비로소 나는 고향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전에는 마을의 공공시설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감옥은 이 마을의 독특한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은 군청 소재지인 것이다. 비로소 나는 이곳 주민들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광장을 둘러보니 어떤 큰 변화, 다시 말해 젊어서 감옥에 들어갔다가 백발이 성성해서 비틀거리며 출옥하는 사람이 봄직한 그런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을과 주와 나라의 모습 위로 어떤 변화가 겹쳐져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경과라고 하기에는 큰 변화였다.


나는 내가 사는 이 주를 한결 뚜렷하게 보았다. 나는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선한 이웃이나 친구로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 사람들의 우정이란 종은 한철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이들은 올바른 일을 하려고 크게 애쓰지도 않으며 이들이 가진 편견과 미신으로 인해 내게는 이 사람들이 중국 사람이나 말레이시아 사람 만큼이다 먼 인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인류를 위해, 아니 자기 재산을 위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결국 이들 도둑이 자기들을 대하듯이 도둑을 대하는 정도의 고결함만을 지닌 채 어느 정도 겉으로만 계율을 준수하고 가끔 기도를 함으로써, 그리고 이따금 별 소용도 없는 곧은 길을 걸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 이웃들을 너무 가혹하게 심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많은 이웃들이 우리 마을에 감옥 같은 시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는 가난한 채무자가 감옥에서 나오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감옥의 창살 모양으로 손가락을 엇갈리게 해서 눈에 대고 그 사이로 쳐다보면서 “안녕하시오?”라고 인사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내게 인사하는 대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자기들끼리 놀아보았다. 마치 내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나는 수선을 맡긴 구두를 찾으려고 구둣방에 가던 길에 감옥에 잡혀갔었다. 다음 날 감옥에서 나온 나는 전날의 용건을 마무리하려고 구둣방으로 달려가서 수선한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는 허클베리를 따러 가는 무리에 합류했는데, 이 사람들은 나한테 길잡이를 맡아 달라고 보챘다. 말이 곧 준비되고, 반시간쯤 뒤 3킬로미터쯤 떨어진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는 허클베리 밭 한가운데 도착해 보니, 주 정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감방생활”의 전부이다.


나는 도로세를 내지 않으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나쁜 국민인 것 못지않게 선한 이웃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를 후원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동포들을 교육시키는 데 나름대로 내 몫을 하고 있다. 나는 세금고지서의 어떤 특정한 항목에 대해 납부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정부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실제로 정부로부터 물러나 떨어져 있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내가 낸 돈이 총이나 그 총을 쏠 사람을 사는 데 쓰이지 않는 한 그 돈의 행방을 구태여 추적하고 싶지는 않다. 돈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만 나의 충성심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 추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 실로 나는 조용히,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정부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이다. 비록 이런 경우에 흔히 그러하듯 계속 정부를 이용하고 그 혜택을 누리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주 정부에 동조하는 뜻에서 나에게 부과된 세금을 대신 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세금을 내면서 했던 일을 되풀이할 뿐만 아니라 주 정부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큰 불의를 행하라고 부추기는 셈이 된다. 세금을 체납한 개인에 대한 잘못된 관심으로, 그 사람의 재산을 보호하거나 감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세금을 대신 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이는 자기의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선(善)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는지 현명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 이것이 지금 나의 입장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의 견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 충실한, 그리고 해당 시점에 충실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주자.


낮은 관점에서 볼 때, 헌법은 비록 많은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훌륭하다. 법률과 법정 역시 존경할 만하다. 심지어 주 정부나 미국 정부조차도 여러 면에서 매우 칭찬할 만하고 유례가 없는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존재 그 자체에 감사를 표할 만하다. 그러나 조금만 높은 관점에서 보면 이 정부들은 내가 지금껏 지적한 그대로이다. 조금 더 높은 관점에서, 아니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보면, 이 정부들이 어떠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자세히 살펴보고 생각해볼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정부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으며, 가급적 정부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세상에서조차 내가 정부 밑에서 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자유롭게 공상하고, 자유롭게 상상한다면,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면, 현명하지 못한 지배자나 개혁자가 그를 치명적으로 괴롭힐 수는 없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나 이와 비슷한 문제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조금도 만족하지 못한다. 정치가와 입법가들은 너무나 철저하게 제도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또렷하고 적나라하게 보지 못한다. 이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사회가 없으면 쉴 곳이 없다. 이들이 어느 정도 경험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이고, 또 정교하고 유용하기까지 한 제도들을 만들어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든 지혜와 유용성은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한계 안에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정책이나 편법으로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훨씬 순수한 진리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진리라는 개울의 발원지를 찾아 상류로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간 적이 없는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성서와 헌법의 옆에 서서 경외와 겸손을 보이며 그 물을 마신다. 그러나 이 호수나 저 연못으로 졸졸 흘러 드는 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원을 향한 순례를 계속한다.


미국에서는 아직 입법에 대해 천재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런 사람은 보기 드물다. 연설가, 정치인, 달변가인 사람은 허다하게 많다. 그러나 오늘날의 곤란하기 그지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설가는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유창한 언변을 그 자체로 좋아할 뿐,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을 좋아하거나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영웅적 행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입법가들은 자유무역과 자유, 화합과 청렴이 한 나라에서 차지하는 비교가치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 입법가들은 과세와 재정, 상업과 제조업과 농업이라는 비교적 손쉬운 문제들에 대해서도 천재성이나 재능을 보여주지 못한다. 만약 의회에 있는 입법가들의 입바른 말에만 우리의 진로를 내맡긴 채 국민의 풍부한 경륜과 효과적인 항의로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미국은 얼마 안 있어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약성서가 쓰여진 지 어언 1800년이 지난 오늘날, 입법이라는 학문에 대해 이 책이 던져주는 빛을 활용할 만한 지혜화 실제적인 재능을 갖춘 입법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권위는, 비록 내가 기꺼이 순종하려는 정부의 권위일지라도 아직 순수하지 못하다.(나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것이며, 심지어 많은 경우에 나보다 잘 알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도 순종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정부는 내가 양도한 것 말고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 어떤 순수한 권리도 가질 수 없다. 절대군주제에서 제한군주제로, 제한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진보는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한 진보이다. 중국의 현인도 개인을 제국의 근간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가 과연 정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진보인가? 정녕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는가? 국가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개인을 더욱 고귀하고 독립된 힘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대접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자유롭고 계몽된 국가는 없을 것이다. 나는 마침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중할 수 있는 국가를 기쁜 마음으로 상상한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초연하고 국가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국가의 품을 뿌리치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국가의 평온을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런 국가 말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저절로 익어서 벌어지게 내버려두는 국가는 더욱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이제껏 내가 상상만 했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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