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착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샌. 2009. 7. 3. 10:12

돌프 페르로엔이 쓴 ‘2백 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는 14살 마리아의 일기 형식으로 된 작은 책이다. 1시간 안에 읽을 수 있지만 책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마리아의 부모는 마리아가 열네 살이 되자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열어준다. 마리아는 멋진 선물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제일 놀라운 선물은 어린 노예 소년 꼬꼬와 채찍이다. 꼬꼬는 접시에 담겨져 식탁에 올려진다. 이 책의 시대 배경은 19세기이고, 마리아는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네델란드령 가이아나에서 대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농장주의 외동딸이다.


천진난만한 소녀 마리아와 가족들이 노예를 경멸하고 인종적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의식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다. 백인들에게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으로 취급되고, 노예 학대에 대해서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동정심도 없다. 인간이 내적 성찰이나 반성을 포기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이 책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한 인간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맑고 순수한 소녀 마리아,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자애로운 부모, 그리고 다정한 친척과 이웃들은 더없이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인류사에서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지금의 우리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노예제는 없어졌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또 다른 노예제가 변형되어 존재하고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악마 노릇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좋은 말이지만 그것이 나와 내 가족에만 머무른다면 결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각성시켜 주고 있다.


자신이 사는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와 그 가족들의 생각과 행위는 우리 모두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일반적인 오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냉철한 자기 성찰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머리에 나온 추천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착하게 사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저 모두의 생각을 따르고, 자기 시대가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남들이 고개를 돌리는 일, 당신도 불편함을 느끼는 그 일, 거기서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만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며, 우리를 우리 시대의 허영과 어리석음, 그리고 끔찍한 악행에서 구원해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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