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에 살면서 대문을 나서면 바로 이런 아름다운 산길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축복을 자주 누리지는 못하지만 언제고 날 기다려주는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오늘도 가벼운 운동화 꺼내 신고 산길에 든다.
일요일인데도 길은 호젓하다. 사람들은 유명 관광지나 축제에는 몰리지만 이런산은 잘 찾지 않는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도리어 그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면 걷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탓도 있으리라.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걷기의 가치를 많이 깨달아가고 있다.
"나는 걸을 때 명상을 할 수 있다.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루소가 '고백록'에서 한 말이다. 또 니체는 말했다.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현인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걷기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산길을 걸을 때는 우주의 파장이 내 영혼과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느낀다. 위대한 존재가 함께 하는 것 같은 편안함과 행복감이 있다. 내 영혼은 성당의 의식보다는 자연의 미사에서 더 신과의 일체감을 맛본다.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 둘레를 따라 두 바퀴를 돌았다. 어제가 현충일이었다. 한 묘비 앞에서 중년의 사내가 소주잔을 비우며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현충원 안의 길은 아스팔트로 되어 있지만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숲길과 다름 없다. 한 바퀴 도는데 40 분 정도 걸리니 3 km 가량은 되는 것 같다. 히말라야에 가기 전에 이곳이 내 트레이닝 코스 중 하나였다.
국립현충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 이름이 서달산이다. 그러나 이 산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현충원 뒷산이라고 한다. 산길을 걷다 보면 절집 두 채를 만난다. 하나는 현충원 안에 있는 지장사(地藏寺)이고, 다른 하나는 달마사(達磨寺)다. 특히 달마사는 야생화를 정성들여 가꾸고 있어 지날 때면 늘 경내로 들어가 구경을 한다.
어제는 서울에 올라오신 장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강화도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애기봉(愛妓峯)에 들렀는데 약 20 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갔던 옛 생각이 났다. 그때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잘못하면 북한군이 나와서 잡아갈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무서워서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기억이 난다.
맞은편 북녘 땅을 바라보며 민중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남북 위기상황을 조성하는, 남과 북 그리고 소위 강대국들이라는 정치 지도자들의 농간이 미웠다.인간세상에서 갈등이 없기를 바래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국가간의 긴장과 갈등은 어떤 면에서 부추겨지는 측면이 있다. 세뇌된 국가의식과 애국심, 지배계급의 욕망이 결국은 민중들의 희생만 강요한다. 역사는 똑 같은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광성보 길을 걸었다. 장모님과 아내는 피곤해서 뒤에 처졌다.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를 둘러보았다. 이곳광성보는 1871년에 미군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광성보 앞 바다가 손돌목[孫乭頂]인데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내가 갔을 때가 마침 밀물이어서 육지쪽으로 몰려가는 바닷물의 유속이 엄청 빠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경사진 곳을 내려가는 강물처럼 물살이 빨랐다. 여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후금이 쳐들어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이 뱃길 안내를 맡았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라 생각하고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 전에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결국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햇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은 후 손돌을 의심한 것을 후회하고 후히 장사 지내도록 했다.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 덕포진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이와 유사한 전설들이 사실 많이 전하고 있다. 하나같이 지배자의 독단이나 전횡과 민중들의 억울한 죽음이 연관되어 있다.
휴일 오후 강화도 길은 차들이 많이 막혔다. 우리는 해수 찜질방에서 넉넉하게 놀다가 늦으막하게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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