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부장님과 선생님

샌. 2009. 4. 16. 10:07

몇 해 전에 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다. 한 해만 하고 그만 두었는데도 그 뒤에도 계속 “0 부장님”하며 부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부장이라고 직책을 붙이는 것은 나로서는 영 듣기가 거북했다. 몇 사람에게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물론 그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장이라고 불렀다가 다시 선생님으로 바꾸게 되는 어색함도 있을 것이고, 또 상대에 대해서 예우를 갖춰준 의미임도 안다. 나 역시 보직을 맡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장님’이라고 불러준다. 또 선생님보다는 부장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주임교사로 불리던 자리가 언젠가부터 부장교사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바뀐 호칭이 어색했는데 지금은 부장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회사와 달리 교직사회의 부장은 위계를 가진 조직의 한 부분이 아니다. 계장, 과장, 부장으로 연결되는 업무의 고리도 없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부장으로 바꿔 부를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우리 아파트의 수위 일을 보시는 분이 나를 볼 때마다 사장님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낯설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호칭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런 말들이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무조건 사장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가 그만큼 돈 중심으로 기울어 있다는 반증이다. 대학에서도 교수들에게는 ‘박사님’이나 ‘교수님’으로 불러주어야 흡족해한다고 한다. 그냥 ‘선생님’으로 통용하면 안 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될 때가 많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예전에 친구 K는 나를 꼭 ‘0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대학원 근처에도 간 일이 없는 나에게 박사는 얼토당토않을 뿐더러 그런 말을 듣는다고 누구나 다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 파문이 있었는데 그것도 내재적 가치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잘은 모르지만 서양은 우리만큼 호칭이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신분이나 직책을 그대로 나타내는 호칭은 말하기도 듣기도 어색하다. ‘판사님’ ‘검사님’ ‘의원님’ 등의 호칭은 지배복종관계를 나타내는 아부성의 느낌이 들어 은근히 불쾌하다. 그런 말들 속에는 신분사회를 드러내면서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젊은 검사에게도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군대시절 법무부 사무실에 있을 때 갓 사법고시를 패스한 새파란 검찰관에게 누구나 ‘영감님’ 하며 굽실거리는 모습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병원에서는 의사를 선생님으로 통칭해도 되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자신들끼리는 ‘닥터’라고 부르는지는 몰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그냥 선생님으로 불러도 되니 무척 마음이 편했던 경험이 있다.


난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직장에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여기는 직급이 세분화되지도 않아서 그저 모든 사람이 두루 선생님이다. 사실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것이 없다. 연하의 사람에게 써도 괜찮으니 꼭 인생 선배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뜻은 당신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니 이보다 더 좋은 호칭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두루두루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교수도 선생님이고, 농부도 선생님이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서로 선생님으로 호칭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인간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증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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