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54]

샌. 2008. 12. 28. 17:20

남해의 황제 숙과

북해의 황제 홀이

중앙의 황제 혼돈과

어느 날 중앙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상의한 끝에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기로 하였다.

사람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은 유독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갔다.

그러나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南海之帝爲숙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숙與忽 模報渾沌之德

嘗試착之

曰 人皆有七窺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日착一窺

七日而渾沌死

 

- 應帝王 5

 

이 우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2300여 년 전의 장자가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는 소리 같이도 들린다. 혼돈(渾沌)은 만물의 시원의 상태다. 아직 사물이 분화되기 전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무질서의 상태다. 영어로 카오스(chaos)라 하는데 장자는 이 혼돈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본다. 인간이 만드는 문화는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의 생명력에 칼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예로 자연을 사랑한다는 표어는 넘치지만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간섭은 혼돈에 구멍을 뚫는 비유와 같다. 자연을 아끼고 살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자연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생겨난 온갖 지식이나 관념들이 인간의 참생명을 죽이는 족쇄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문명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도리어 세상은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그에 따라 인간의 욕망 또한 끝도 없이 팽창하고 있다. 장자는 그런 껍데기를 버리고 원래의 생명력을 찾으라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구멍뚫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욕심의 구멍을 막고 욕망의 문을 닫으라'[塞其兌閉其門]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사족이지만 '유전공학'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생명을 공학적으로 다룬다는 개념 자체가 마치 장자의 혼돈 비유처럼 무섭게 느껴진다. 목숨을살리는 것 같지만 실제는 혼돈을 사랑해서 구멍을 뚫다가 혼돈을 죽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그래서 장자의 이 비유는 현대문명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나에게는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장자는 생명으로 충만한 혼돈을 사랑한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이 살아있는 무질서를 사랑한다. 그것이 노자에게는 '통나무'[樸]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인간의 분별심이나 욕망, 이기적인 술수 이전의 상태다.노자나 장자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거기라고 말한다. 구멍을 뚫음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조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자연이 준 생명력을 죽이는 결과로 돌아온다. 지금 세상의 흐름이 꼭 그런 것만 같다.

 

'삶의나침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56]  (0) 2009.01.03
장자[55]  (0) 2008.12.30
장자[53]  (0) 2008.12.20
장자[52]  (0) 2008.12.13
장자[51]  (0) 2008.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