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나무

샌. 2008. 12. 10. 09:10

어쩌다 이과를 선택해서 물리를 전공하게 되었지만 중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한 과목은 국어였다. 당연히 성적도 다른 과목에 비해 높게 나왔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제일 기억에 남는 선생님 또한 국어 선생님이시다. 고등학교 1 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얼마나 글을 감칠맛이 나게 풀이하시는지 국어 시간이면 늘 가슴이 콩닥거렸다.나중에 고문(古文) 공부를 하면서는 흥미가 떨어졌지만 국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시간을 통해 아름다운 글들을 만나는 기쁨이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나에게 그런 문과적 기질이 있는지 수업에 들어가면 아이들로부터 국어 선생님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이 물리를 제대로 못 가르친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다. 내 삶을 돌아보아도 끊임없이 문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했던 적이 많았다. 지금만나는 사람들도 이과보다는 문과를 전공한사람들이 훨씬 많다. 또 그쪽 방면의 얘기들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내 안에는 문과적 기질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학창 시절에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럴 시간 여유도 없었다. 입시 준비에 바빴던 우리들 대부분은오직 교과서를 통해서 명작들과 만날 수 있었다. 문학소년이 아니고서야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사치에속했다.당시는 어쩌면 순수문학 작품에 굶주려 있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교과서에 소개된 명문들이 어린 가슴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40 년 전 국어 교과서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구절들이 기억나는 걸 보면 시험 준비를 위해 외웠다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청춘예찬'을 읽으면 예나 지금이나 가슴이 뛰는 건마찬가지다.'신록예찬'이나 '페이터의 산문', '낙엽을 태우며'도 그렇다.그것은 이런 작품들이 명문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청소년기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서일 것이다. 현재와 과거가 같은 정서로 겹치면서 애틋한 그리움 같은 걸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양하 님의 수필 '나무'를 다시 보면서 옛날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수필 역시 고등학교 때 만났던 작품이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라는 구절을 보니 마음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글을 통해 옛 추억에 잠기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겸하여 '나무의 위의(威儀)'라는 작품까지 함께 읽어본다.

 



나무 / 이양하(李敭河)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滿足)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處地)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움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義理)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장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厚待)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薄待)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多幸)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不幸)해 아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同情)하고 공감(共感)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一生)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默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며,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嚴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理由)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自己) 소용(所用)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怨望)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材木)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의 위의(威儀) / 이양하(李敭河)

 

첫여름은 무엇보다 볕이 아름답다. 이웃집 뜰에 핀 장미가 곱고, 길 가다 문득 마주치는 담 너머 늘어진 들장미들이 소담하고 아름답다. 볕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미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첫여름은 무엇보다도 나무의 계절이라 하겠다. 신록(新綠)이 이미 갔으나 싱싱한 가지가지에 충실한 잎새를 갖추고 한여름의 영화(榮華)를 누릴 모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주는 기쁨과 위안이란 결코 낮춰 생각할 것이 아니다. 살구, 복숭아, 매화, 진달래, 개나리, 장미, 모란, 모두 아롱다롱 울긋불긋 곱고 다채로워 사람의 눈을 끌고 마음을 빼내는 데가 있으나, 초록 일색의 나무가 갖는 은근하고 흐뭇하고 건전한 풍취(風趣)에 비하면 어딘지 얇고 엷고 야한 데가 있다. 상나무, 사철나무, 섶, 도토리, 버들, 솔, 잣, 홰, 느티, …… 우리 동리에서 볼 수 있는 나무로서 앞서 말한 꽃에 비하여 손색 있을 것이 없다. 또, 모든 나무는 각기 고유한 모습과 풍취를 가진 것이어서 그 우열(優劣)을 가리고 청탁(淸濁)을 말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내 가까운 신변에, 이 때가 되면 오래 보지 못한 친구들 찾듯이 돌아다니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특히 찾아보고 즐기는 몇 그루의 나무를 가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는 내 집의 한 포기 모란이 활짝 피었다 지는 무렵, 온 남산을 가리고 하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는 앞집 개쭝나무다. 참말로 잘 생긴 나무다. 훤칠하니 높다란 키에 부채살 모양으로 죽죽 뻗은 미끈한 가지가지에 채통치고는 좀 자잘한 잎새를 수없이 달았다. 보아서 조금도 구김새가 없고 거칠매가 없다. 어느 모로 보나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풍모다. 바람 자면 고요히 깊은 명상에 잠기고, 잔바람 일면 명상에서 깨어 잎새 나붓거리며 끊임없이 미소 짓고, 바람이 조금 세차면 가지가지를 너울거리며 온 나무가 춤이 된다.

 

아침 산보(散步) 오고가는 길에 매양 볼 수 있는 친구는 길가 두 집에 이웃하여 나란히 섰는 두 그루의 히말라야 으르나무다. 허구한 세월 히말라야 높은 준령의 거센 바람에 인종해 온 먼 조상의 유전인지,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아래로 숙였다. 검고 줄기찬 줄기와 가지에는 어울리지 않게 보드랍고 가느다란 잎새가 소복소복 떨기를 지어 달렸다. 어떻게 보면 가지마다 고양이가 한두 마리씩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고, 가지 끝마다 싹터 나오는 새 잎새는 고양이 발톱 같다. 심지어 몇 해나 되는 나무인지 아직 두서너 길밖에 되지 못하나 활짝 늘어져 퍼진 가지들의 너그러운 품이 이미 정정한 교목(喬木)의 풍도(風度)를 갖추고 있다.

 

다음으로 내가 일상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친구는, 우리 교정(校庭) 한가운데 섰는 한 그루의 마로니에다. 가까운 주위의 자자부레한 나무들에 가리워 있어 그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나, 나무로서는 역시 잘 된 나무다. 잎새는 밤나무보다 줄기 밑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총총히 뻗은 데다 나무 잎새가 또 그 가지가지 밑에서부터 끝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 나무의 속으론 햇빛도 좀체 뚫지 못하고 바람도 웬만해서는 흔들지 못하는 깊고 짙고 고요한 그늘을 가졌다. 꿈의 나무라고도 할까. 아침, 저녁, 대낮, 한밤, 꿈 안 꾸는 순간이 없다. 무슨 꿈을 꿀까. 무척 다채로운 꿈일 것으로 생각되나, 그 깊은 꿈은 얼른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길이 없다. 아무튼, 피와 살과 냄새로 된 사람의 어지러운 꿈이 아닐 것은 분명하고, 그 가운데 평화(平和)와 정일(靜逸)과 기쁨이 깃들였을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걸엇길 한 오 분, 십 분 걷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성균관(成均館) 안에 온 뜰을 차지하고 구름같이 솟아 퍼진 커다란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한말(韓末)의 우리 겨레의 설움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도 겪고 좀더 젊어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시절, 나라의 준총(俊聰)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명륜당(明倫堂)에 모여 글 읽던 것을 본 기억도 가진 나무다. 이젠 하도 늙어 몇 아름 되는 줄기 한 구석에도 동혈(洞穴)이 생겨 볼상 없이 시멘트로 메워져 있지만, 원기는 여전히 왕성하여 묵은 잎새 거센 가지에 웬만한 바람이 불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품이, 쓴맛 단맛 다 보고, 청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다.

 

그렇다. 이러한 나무들에게는 한때의 요염(妖艶)을 자랑하는 꽃이 바랄 수 없는 높고 깊은 품위가 있고, 우리 사람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점잖고 너그럽고 거룩하기까지 한, 범할 수 없는 위의(威儀)가 있다. 하찮은 명리(名利)가 가슴을 죄고 세상 훼예포폄(毁譽褒貶)에 마음 흔들리는 우리 사람은 이러한 나무 옆에 서면 참말 비소(卑小)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이제 장미의 계절도 가고 연순(年順)의 노령(老齡)도 머지않았으니, 많지 않은 여년을 한 뜰에 이러한 나무를 모아 놓고 벗 삼아 지낼 수 있다면, 거기서 더 큰 정복(淨福)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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